"처음뵙겠습니다." 황호건 진달래교회 목사님 부부는 아침에 눈떠서 "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서로 문안 인사를 하신다. 처음에는 이게 뭔 말이여 매일 같이 살면서? 확 이해에 와 닿지 않고 참 거시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이 지내다 보니 두분이 70세 가까운데도 늘 아기자기 하기도 하고 서로 잘 챙겨주면서 깨소금 냄새가 솔솔 나는 신혼부부처럼 사신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때는 닭살 돋을 때가 있었지만 그 비결이 아침 마다 새롭게 만나니 그런게 아닌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늘 익숙함에 매몰되어 살고 그 익숙함이 안정되었다는 착각속에 산다.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기억 속에서 만들어져 익숙해진 범주화된 개념들 그리고 편견들과 우상들, 끼워진 구조들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삶의 사건에 대한 살아 있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생명을 잃고 들러 붙은 딱딱한 겉껍질일 뿐인 고착인데 그것을 안정이라고 여기는 것이 착각이란 뜻이다. 목사님 부부는 그 단단히 고착된 겉껍질을 벗고 날마다 돋아나는 새살로 얼마나 설레고 새롭게 만날까? 그들이 만나는 아침세상은 얼마나 새로울까? "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새로운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처음처럼 늘 새롭게 만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유명한 강남순 박사의 말을 빌리면 마리린먼로를 그린 미국의 PopArt의 아버지라 불리는 앤디워홀은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만나고 대하는 사물 마다 처음 대하듯 한다고 한다. 그의 처음 만남은 잊음으로 부터 시작되어 창조작업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처음 만남은 잊음이라는 기억이 해체된 창조작업의 모티브다. 그의 작품들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 오르는 창조힘의 원천은 처음 만남이다. 해체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고대 철학으로 부터 형성된 언어적 개념이나 구조의 안정성을 송두리째 흔들고 많은 다른 결들을 드러내게 하는 해체작업을 통해 새롭게 만나게 한다. 이러한 해체작업은 무너뜨림과 파괴가 아니다. 실제 삶의 사건에서 기억으로 형성된 개념이나 구조들이 해체되어 다양한 결들이 드러나면서 지금 여기서 시간과 공간에 새로움과 차이로 그 의미가 부여된다. 데리다의 의식의 구조와 언어개념의 해체를 통해 우리의 이원화된 기억이 해체되고 모든 사물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차이와 반복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나무모양의 하이어라키적 구조를 가지는 모든 삶의 양태에서 그 구조에 예속되지 않는 순수차이를 발견해 차이로 생성 되는 새로움을 도출한다. 존재의 잠재성은 차이의 생성으로 새로운 현실성을 갖게되어 시간과 공간속에서 동일성을 허락치 않는 리좀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나게 한다. 여기를 기점으로 익숙함과 이별하고 늘 새로움과 만나는 노마드의 삶을 살 수 있게한다. 새로운 처음 만남은 창조의 원천적 힘이고 해체로부터 얻는 차이와 생성이며 리좀과 노마드 그리고 완전한 초월이다. 어느 대상에 대한 처음 만남은 그 대상에 대한 시계열상에 있는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잊음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그것은 우리의 뇌구조와 기능이 과거에 경험한 정보를 기억이라는 창고에 넣어 뒀다가 대상을 인식할 때 참조하고 색인해서 인출해 내는데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전 기억을 모두 잊고 대상을 새롭게 만나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불교 유식학에서는 연기적 속성을 가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설명한다. 인식 대상이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 되어 제6식(의식)과 제7식(말나식) 그리고 제8식(아뢰야식)의 전변에 의해 하나의 개념이나 형상으로 인식되고 인식된 대상은 제6식에는 의식으로 제7식에는 자아와 결합되고 제8식에 종자식으로 저장된다. 이러한 일련의 기억화는 현상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유식론은 모든 인식대상이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곧 이렇게 형성된 개념이나 의식은 결합된 조건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는 假有인데 實有로 착각하여 고착된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고착된 개념이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따라 四尋思觀 修行으로 4단계에 걸쳐 해체하면 轉識得智의 직관과 통찰지를 증득하여 대상을 처음 새롭게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좀더 쉬운 접근법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로 고착되어 처음과 끝이 있는 일직선상의 시간의식을 원으로된 환형시간의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일직선상의 현재는 항상 과거와 미래가 겹쳐지는 부분이라 우리의 의식이 늘 과거나 미래에 갖혀 있게 된다. 그러나 환형시간은 처음과 끝이 없는 원이기 때문에 어느 점이든 시작이다. 그 점이 영원한 현재(Eternal Now)며 늘 새롭게 만나는 처음이다. 이점에 서 있으려면 언제나 깨어 그 점에 서 있음을 알아 차려야 된다. 조는 순간 과거나 미래로 떨어 지고 만다. 지금 여기 머무는 것이 곧 새로운 첫 만남이다. 지금 여기에서 직관의 눈을 뜨면 이렇게 고운 세상을 처음 새롭게 만나게 된다. 예배당에 앉아서 목사님 설교를 듣는 청중들 중 눈뜨고 조는 사람이 많은 것은 늘상 그 말씀이 그 말씀이라는 익숙함에 젖어서 새롭게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님과의 해후가 새로운 첫 만남이다. 새로운 첫 만남은 그렇게 낯설고 놀람의 감동이다. 고등학교 동기동창 모임에 가면 늘상 옛날 일들을 이야기하고 또 하고 듣는 친구들은 열번은 더 들은거 같은데 말하는 친구는 처음 하는듯 신나 하는 친구가 있다. 듣기 딱해서 야 좀 먹으면서 얘기하자 해도 소용없다. 날마다 새날인데도 그 친구는 아직 과거 기억속에 갖혀있다.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봄되면 새순 돋듯 날마다 새로운 청춘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요즘 아침에 일어나 와이프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문안 인사를 여쭙는데 아직 어색하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아침마다 새롭게 만날 준비가 덜 된 탓이리라. "처음 뵙겠습니다" 아르케(άρχ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