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6 / 선이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의 부족함도 숨김도 없이 드러나 작용하고 있는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다
6. 증시랑에게 답함(5)
편지를 받아 보니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을 없애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돼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이 말은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방편의 가르침을 빌려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만,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아니하면 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보내온 말과 제 생각이 같아서 읽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 어리석은 무리는 다만 방편을 고수하고 버리지 아니하며, 실법으로 사람들에게 지시해 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름과 삿됨을 변별하는 논설’을 만들어 이를 구원했습니다. 근세에 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하여 담담하고 맑은 곳에 합쳐지는 것으로 구경을 삼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것으로 종사를 삼는 사람이 삼대나 좁쌀같이 많습니다. 제가 근간에 일찍이 승려들과 이 두 가지 화두를 거론했더니, 정히 보내온 편지에 말한 것과 같아서 한 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반야 가운데 마음을 두었으되 생각 생각이 사이에 간단되었다면, 능히 위로부터 모든 성인의 모든 다른 방편을 밝게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칼자루를 잡았습니다. 이미 칼자루를 잡았는데 어찌 방편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지 못할까 근심합니까?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되 경전의 가르침과 고인의 어록과 여러 가지 다른 언구를 보고도 또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하십시오. 수미산과 방하착,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 죽비 화두,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신다는 화두,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와 같은 것에도 또한 이와 같이 공부하십시오. 다시 따로 다른 분별심을 내거나 도리를 구하여 기량을 내지 마십시오. 당신이 능히 급류 속을 향하여 항상 스스로 이와 같이 잡아가고도 만약 도업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험이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받아 보니, 밤 꿈에 향을 사르고 저의 방에 들어와서 매우 고요했다고 하니, 간절히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참으로 방에 들어왔던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묻기를 “꿈속에서 육바라밀을 말하니 깨어 있을 때와 같은가, 다른가?” 하니, 수보리가 말하기를 “이 뜻은 깊고 깊어서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미륵대사가 계시니 당신께서는 그분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돌!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설두스님이 이르기를 “당시에 만약 놓아 보내지 않았다면 곧 한 방망이 때려주어야 했다. 누가 미륵이라 이름하며, 누가 미륵인가? 문득 얼음이 녹고 기와장이 풀어지는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돌! 설두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다만 증시제가 밤 꿈에 운문의 방에 들어갔다고 하니, 또 말씀하십시오. 깨어있을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를 묻는다면, 운문은 곧 그를 향하여 말하겠습니다. ‘누가 방에 들어간 사람이며, 누가 방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며, 누가 꿈을 꾼 사람이며, 누가 꿈을 말한 사람이며, 누가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누가 진실로 방에 들어간 사람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돌!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서장 6 - 증시랑에 대한 답서(5)
분별의식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
“만약 고요한 곳을 옳다고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세간상(世間相)을 부수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며 생멸(生滅)을 떠나 적멸(寂滅)을 구하는 것입니다.”
보통 선을 공부한 다고 하면 고요한 곳에서 말없이 앉아 잡념을 내지 않고 정신을 호흡에 집중하거나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병에 응하여 약을 사용하는 임시적인 방편을 마치 선 공부의 필수과정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선이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의 부족함도 숨김도 없이 드러나 작용하고 있는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다.
즉 선은 견성(見性)하여 자신의 본래면목을 아는것일 뿐이다.
자성은 말할 때나 입을 다물고 있을 때나, 움직이며 돌아다닐 때나 고요히 앉아 있을 때나, 어떤 생각에 골몰할 때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자고 있을 때나 한결 같을 뿐이고 어떤 차별도 없다.
자성은 본래 아무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차별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별상(差別相)을지어서는 안된다.
즉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버리고 취하고 한다면, 이것은 분별의식(分別意識)의 환상 위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일 뿐이 고, 자성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자성이 어떤 분별의식에도 속하지 않는 보편성을 가지는까닭은 스스로에게 어떤 차별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성을 바로 본다면, 고요한 때와 시끄러운 때가 차별이 없고 세간상과 실상이 다름이없으며 생멸과 불생불멸이 같은 것이다.
선은 이러한 여러 가지 차별상은 아니지만, 또한 차별상을 떠나서 따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흐름을 따라 성(性)을 알아차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고 하였고, 유마거사는 “비유하면 높은 등성이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진흙에 연꽃이 난다”고 하였으며, 붓다는 “진여는 자성을 지키고 있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일체 만법을 성취한다”고 하고, 또 “인연을 따라 감응하며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도 늘 깨달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성이 어떤 차별상에도 구속됨 없이 언제 어느 경우에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선의 공부에는 어떤 특별히 정해진 필수적 공부과정이란 있을 수가 없다.
정해진 과정은 정해진 결과에로 이끌게 되지만, 선에는 어떤 정해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이다 혹은 저것이 선이다 하고 정하는 순간 바로 변견(邊見)에 빠져서 선과는 어긋나버린다.
임제(臨濟) 스님이 법상에 올라 첫마디에 “말을 하면 바로 어긋나버리며 발붙일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한 것이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선의 공부란 특정한 과정을 거쳐 특수한 기능을 연마하거나 어떤 숨어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도(道)는 닦는 것이아니다”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요사이 몇몇 단 체에서 일정 기간 동안 특정한 프로그램을 거치면 견성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선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의 요소는 두 가지이다.
우선 필요한 것은 공부인 스스로의 발심(發心) 이다.
돈·출세·명예·학식·사랑 등 세속의 좋은 일들은 결국 나를 구속하고 나를 번뇌하게 하는 원인임을 알아서 이러한 모든 세속의 일들에 연연하지 않고,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구원을 얻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가지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발심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리의 감로수를 눈 앞에 가져다 주어도 그것을 마시지 못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때로 마음을 직지(直指)하여 견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스승의 존재이다.
이 두 요소가 갖추어지면 선 공부는 반드시 성과를 이룰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가슴 깊은 곳에서 간절한 발심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견성의 계기는 언제 어디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불교에서의 自性은 眞如 一心이요 기독교에서의 自性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空性을 관하는 禪에서는 無自性을 관하는데 이는 쌍차쌍조를 위한 俗諦의 緣起實相을 보는 空觀이기 때문에 自性을 觀하는 一心觀은 眞諦로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것이라 관하는 대상이 달라 충돌하지 않는다. 간혹 自性과 佛性을 중국불교의 특징적인 것으로 無我(안아트만)를 설한 불설과 배치된다하여 부정하는데 이 문제로 백양사에서 무차법회를 열어 자성과 불성이 불설이냐 아니냐를 놓고 야단법석을 폈다. 자성과 불성을 더 알고 싶으면 당시의 발제와 발표 논문을 참고하면 좋겠다. 佛性實體論을 주제로 세계석학들이 모여 2004. 8. 18부터 4박5일간의 논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