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증시랑에게 답함(6)
보내온 편지를 여러 번 자세히 읽고 철석과 같은 마음을 갖추고 결정적인 뜻을 세워 대강 대강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점점 나아가서 죽는 날에 이르면 또한 능히 염라대왕과 서로 겨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최고의 눈을 열어서 금강왕 보검을 잡고 비로정상에 앉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일찍이 바깥 도우에게 말하기를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다만 빠른 효과만 구하고 그릇되어 있음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말하기를 “일을 없애고 인연을 덜고 고요히 앉아서 참구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몇 권의 경전이라도 보고 염불을 하며, 부처님 앞에 예배를 많이 하고 평생 지은 죄와 허물을 참회해서 염라대왕의 손 가운데 쇠몽둥이를 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지금 도가의 무리들이 망상하는 마음으로 해와 달의 정화를 상상하며, 노을을 삼키고 기운을 복용하더라도, 오히려 몸을 세상에 두어 추위와 더위의 핍박을 면하는데 하물며 이 마음과 이 생각을 돌려 오로지 반야 가운데 두는 것이겠습니까? 옛 성인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비유하자면 파리가 어느 곳에나 능히 앉을 수 있으나 오직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으니, 중생도 또한 이러해서 곳곳에 능히 반연하되 오직 반야 위에서는 반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생각마다 초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세간의 진로와 반연하는 자기의 심식을 잡아 반야 위에 돌려놓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하지 못하더라도 임종할 때에 결단코 악업에 끌리거나 악도에 흘러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음 생에 태어날 때 나의 금생 원력을 따라서 반드시 반야 가운데 있어서 現成하여 수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중생계 안의 일은 배우지 않아도 시작 없는 옛날부터 습승이 익숙하며, 길도 또한 익숙하여 저절로 취함에 좌우에서 그 근원을 만나니 모름지기 버려두십시오. 출세간에서 반야를 배우는 마음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등지고 어긋났습니다. 잠깐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들어도 저절로 이해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결정적 뜻을 세우며 그것과 더불어 주관을 세워 결단코 두 가지를 세우지 마십시오. 이곳에 만약 들어가기를 깊이 하면 저곳에는 물리쳐 보내지 아니해도 모든 마군과 외도가 저절로 없어지고 굴복할 것입니다.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하는 것이 정히 이것입니다. 날로 공부를 하는 곳에 칼자루를 잡아서 점점 힘 덜림을 아는 때가 문득 힘 얻는 곳입니다.
서장 7 - 증시랑에 대한 답서(6)
생각 놓는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중생 세계의 일은 애써 배우지 않아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리 저리 되는대로 행하여도 늘 그 근원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옆으로 밀쳐 두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출세간(出世間)의 반야심(般若心)을배우는 일은 아득한 옛부터 익혀온 일과는 서로 위배되어서, 선지식의 말을 조금 듣는다고 하여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적인 뜻을 세워서 굳게 지켜나아가 중생사(衆生事)와 반야심(般若心)이 결코 양립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반야심에 깊이 들어간다면 중생사를 애써 물리치지 않아도 온갖 사마(邪魔)와 외도(外道)가 저절로달아나고 항복할 것입니다."
선문(禪門)에 들어오는 첫째 조건은 발심(發心)이다.
발심이란 우리의 세속적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세속의 여러 가지 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얻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만약 세속에서의 여러 가지 일이 원하는대로 잘 되기를 발심한다면, 이것은 선 공부의 발심은 아니다.
선 공부는 세속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선 공부를 하려면 어떠한 세속적인일도 가치 있게 보아서는 안된다.
오로지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서 세속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온갖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세속의 일에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거의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쪽으로 눈길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 공부에서 목표로 하는 반야(般若)는 아직 한번도 그 맛을 본 적이 없으므로 생소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세속과 반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더욱 반야에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세속에서의 일은 무슨 일이든 모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 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이든 아니면 생각 속에 있는 대상이든 아니면 정서적으로 느끼는 대상이든 아니면 의욕을 가지고 바라는 대상이든, 세속적 일은 모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상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반야에는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 없다.
반야는 곧 해탈인데, 만약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우리는 그 대상에 구속되어버리므로 그것은 해탈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파리가 곳곳에 앉을 수 있지만 오직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는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 곳곳에 관계할수 있지만 오직 반야에는 관계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생각을 놓는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반야를 잡는다’는 말은 방편어로서도 어색한 말이다. 반야는 관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잡는다’라는 말이 해당되지 못한다.
이처럼 반야가 관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를 공(空)이라고도 표현한다.
마지막 한 생각 내려놓는 것을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 서서 앞으로 한발 내딛는다.’고 하는 말도 같은 뜻이다.
생각과 같은 세간의 일에는 발디딜 곳이 있지만, 반야는 허공과 같이 발 디딜 곳이 없다.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마음을 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생각 놓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범부는 반드시 자기자신[自我]이라는 생각과 관념에 머물러 여기에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온갖 종류의 사량분별을 통하여 자신의 관념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라는 관념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스스로 헛된 환상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거꾸로 된 어리석음 이며, 모든 번뇌가 이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르지 않으면 추락 해버리는 중력 속의 물체가 아니라, 본래 중력의영향을 받지 않는 공(空)이라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육체는 백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서 한 발 내디디면 추락하여 죽고 말겠지만, 마음은 한 발 내딛어 허공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본래 공(空)인 자기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자기자신 버리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첫댓글 반야는 空性의 지혜입니다. 공성의 지혜는 사물을 볼 때 저것은 독립적인 불변의 실체인 자성이 비어 모두 상의상관으로 緣起하여 성립한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法空입니다. 我空은 나라고 여기는 오온도 자성이 텅비어 緣起에 의해 모였다 흩어질 뿐이라고 보고 나라는 생각을 내려 놓는 지혜입니다. 이 공부가 다 익었으면 부자 친구가 친구를 돕고 싶어 통장에 잔고가 천만원 찍힌 것과 일억이 찍힌 통장을 선택하라고 할 때 두 통장을 비교하지 않고 주는대로 받고 다른 통장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다 익은 것입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할거냐고요? 이런 경우도 없겠지만 모르겠어요. 내가 필요한 만큼 인연이 닿는 통장을 받지 않겠어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法空,
장로님의 말씀을 통해서 분별심 없는 반야의 지혜를 봅니다.
말씀에 기운과 은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