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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6~45의 대반전)
마태복음 26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의 인간실존의 한계상황과 제자들의 한계상황 그리고 그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대반전의 네러티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닥쳐올 자신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고민하고 슬퍼하며(마26:37b)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 예수의 죽음 앞에 드러난 불안과 고통은 세번에 걸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a)라고 기도하며 극에 달합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인간예수는 유한의 존재로서 죽음이라는 비존재의 공격을 적나라하게 받으며 죽음 앞에 불안과 공포에 떨고 회피하려는 한계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러한 인간예수의 기록은 한 점 흠 없는 제물로서의 어린양도 아니고 대속교리에서 예수 자신의 죄가 일도 없이 백퍼 우리의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구원의 서사도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이 기록만 보면 아직 인간예수는 죽음이라는 불안과 고통이라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음 앞에서 벌벌 떨다 허무하게 죽었다면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는 없었겠죠. 그러나 기자는 네러티브의 대반전으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b)"라고 기록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운 이 기도로 길 없는 넓은 길이 열리고 없는 문이 활짝 열립니다. 이 기도로 비존재의 불안을 온전히 용납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용기가 드러납니다. 이 용기는 나는 어차피 부활 할 것이니까 고난과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용기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이 기도로 한 점 흠 없는 제물로 어린 양이 되었으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용기도 아닙니다. 나는 떳떳하니까 죽일테면 죽여 보라는 똥뱃짱의 용기도 아닙니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용기도 아닙니다. 총구를 이마에 대고 쏘려할 때 그 불안과 싸우지 않고 그대로 쏠테면 쏘라고 용납하는 용기입니다. 존재가 비존재의 불안을 껴안고 용납하여 살아가는 용기입니다. 위험 천만한 전염병 환자를 내 방에 용납하고 사는 사랑의 용기입니다. 이 용납의 용기 앞에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라는 기도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 후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아버지의 용납을 용납하는 용기입니다. 즉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께 맡기고 드렸을 때 용납한 그 용납을 용납하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용납은 무한한 사랑이기에 나의 용기는 한센병으로 문드러진 손으로 악수하려 내민 손을 용납하는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 입니다.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용납하여 아들의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용기입니다. 탐진치에 물든 나를 못박을 십자가를 기꺼이 용납하는 용기입니다.
이렇게 비존재의 불안까지도 용납하는 용기는 하나님 안에 뿌리내린 용기입니다. 처음 비존재의 불안에 떠는 존재의 인간예수(正)는 '내원 대로 마옵시고'라는 기도로 비존재의 불안에 떠는 나를 부정하고(反)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에 이어 '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 속에 그 용기를 하나님 안에 뿌리 내림으로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납니다(合). 비로소 인간예수가 죽음과 불안의 강을 건너 하나님안에 뿌리내린 용기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춥니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죽음과 죽음 후에 대한 무지라는 측면에서 살펴 봅니다.
生과 死라는 이분법적 분별의식으로 죽음의 불안에 떨던 나의 실상을 여실히 보고 앎으로 그 불안이라는 병의 원인을 알아서 불안을 해소하는 방편입니다.
죽음이라는 현상과 죽음에 대해 불안해 하는 나의 정체를 모두 여실히 알면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빈 관 속에 드러누어 관 뚜껑을 덮고 체험해 보는 것은 죽음에 직면해 지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하여 삶의 태도를 바꿀수는 있지만
원초적인 죽음의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함께 卽해 있습니다. 이 말은 生과 死가 둘이 아닌 不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가 사라진 실체가 아닌 말로만 있는 개념입니다. 즉 존재의 그림자 이기에 딱 붙어 하나로 卽해 있고 그림자이기에 실체가 없습니다. 비존재 즉 죽음이 실체가 없는 것인데 실체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비존재의 불안이 존재를 공격합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토방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는데 마치 대나무 빗자루로 쓰는 것처럼 먼지가 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는다'고 할 때 '나'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이 인연조건 따라 뭉쳐졌다 인연조건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인데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죽을 '나'가 없는데 죽으면 내가 사라진다는 착각으로 불안하게 됩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죽음이라는 비존재와 죽는 다고 생각하는 '나'의 실상을 여실히 보면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탐진치에 물든 나도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도 실체가 아닌 그림자 이기에 두려울 이유 없이 모두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 앞에 불안에 떨던 인간예수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라고 죽음에 대한 불안의 뿌리인 '나'를 부정함으로 '나'가 죽는다는 착각으로 부터 벗어났기에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불안과 고통을 그대로 용납한 그 용기를 하나님안에 뿌리 내림으로 비존재의 그림자가 없는 그리스도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의 용기에 참여만 하면 됩니다. 인간예수가 그 용기로 십자가를 통해 건너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 예수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예수를 흠 없는 어린 양이라는 제물로 만들 이유도, 나의 죄를 예수한테 전가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 십자가의 죽음을 용납하는 그 용기를 하나님안에 뿌리 내려 하나님이 용납하게 하고 하나님의 용납을 용납하는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존재의 용기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예수가 나의 실상을 여실히 보아 나를 부정하고 나를 부정하니 죽음이 쏘는 화살은 그림자에 불과해 죽음을 용납하는 용기의 믿음으로
하나님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새로 태어난 나를 통해 이루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그러느냐? 아닙니다. 지금의 삶을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비존재의 불안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생사의 분별과 나라는 한 생각을 내려 놓고 '나'가 '나'가 아닌 실존을 긍정하고 껴안고 용납하는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나라에서 예수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 까지 인간예수께서 죽음의 불안과 고통을 직면하고 어떻게 존재의 용기로 죽음의 불안과 고통을 건너셔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는지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대 서사의 네러티브로 살펴 봤습니다. 인간예수가 겪은 고난과 죽음을 사실 여부를 떠나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의 방향과 방법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윗글에서 폴틸리히의 입장과 불교적 입장에서 제 나름으로 해석해 봤습니다만 탈 종교의 시대에 어떤 해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나름 어떤 해석을 할 것인가는 이 시대의 우리의 몫입니다.
첫댓글 장로님의 마태복음 26장에 새겨진 말씀이 복음입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뜨겁게 사신 님께서 서술한 한계상항을 극복하는 대반전의 네러티브가
장관이고 흥미롭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어버지 뜻대로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