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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첸 고지 후방에다 예비부대 숨기고 / 병력 적은 것으로 속여 적 오판공격 유도
기습공격으로 러시아군 양분시키며 대승 / 오스트리아·러시아·영국의 3국동맹 분쇄
아우스터리츠 전투 |
나폴레옹 초상화. |
나폴레옹 전쟁은 1799~1815년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 등 유럽의 열강들과 벌인 전쟁을 말한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 와중에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1799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이후 혁명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이끌고 유럽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른바 ‘군사적 천재’로서 그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것이 바로 1805년 12월 초 나폴레옹군과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 간에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였다.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은 10년간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을 강타한 프랑스
혁명(1789~1799)이었다. 나폴레옹은 혁명 속에서 성장하고 그 와중에 군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종국에는 프랑스의 통치자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봉 왕조의 실정(失政)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 불평등한 신분제에서 배태된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 그리고 중산계급의
성장과 불만 등이 상호작용해 발발했다. 국왕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과 일명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대변되는 급진적 개혁으로 프랑스 사회는
요동쳤고, 이러한 혁명의 열기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주변의 절대왕정 국가들로 확산됐다. 곧 ‘자유·평등·박애’라는 혁명 이념의 자국(自國)
전파를 우려한 주변 강대국들이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바로 이 전쟁의 바람을 타고서 지중해 코르시카 섬 출신의 시골뜨기 청년장교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코르시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은 10대 중반에
파리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약 6년간 수학하면서 그는 기베르·부르셰 등 당대 프랑스를 대표한 군사사상가들 및 볼테르·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저술을 탐독했다. 1785년 포병장교로 임관 후 자기계발에 몰두하던 나폴레옹은 드디어 1795년 툴룽 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자코뱅파의 실각 후 들어선 총재정부의 신임을 받았다. 정부를 위기에서
구출한 공로로 약관 26세에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어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1796)됐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면서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798년 또 다른 승리를 기대하며 시도한 이집트 원정에서 영국의 넬슨에게 일격을 당한 나폴레옹은 1799년 이집트를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다.
마침내 그해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계속된 군사적 승리를 등에 업고 전 국민적
인기를 얻은 그는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새로운 황제가 됐다. 1814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그는
민법전을 편찬하고 가톨릭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쓰면서, 무엇보다도 대외 군사원정에서 클라우제비츠의 평가처럼 가히 ‘군사적
천재’에 어울리는 빛나는 승리의 발자취를 남겼다.
■전개 과정
17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이 1814년 대서양의 외딴 섬으로 유배당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주변 열강들과 치른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이라고 부른다. 마렝고 전투(1799),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 예나 전투, 러시아 원정(1812),
라이프치히 전투(1813), 워털루 전투(1815) 등이 주 내용이다. 이러한 제반 전투를 통해서 나폴레옹은 군사전략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의 활약은 이후 서양 군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현대의 전략전술 및 무기체계가 그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폴레옹 전략전술의 정수(精髓)를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였다. 1805년 12월 초 나폴레옹은 약
7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체코 동부의 아우스터리츠(현재 슬로바키아 슬라브코프)에서 약 8만 명의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에 맞서 대승을 거뒀다.
당시 오스트리아·러시아·영국은 나폴레옹의 대제국 건설에 대응해 제3차 대불(對佛)동맹을 결성한 상황이었다. 일명 ‘삼제회전(三帝會戰)’으로 불린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1807)으로 러시아의 연합전선 이탈을 강요하고, 이어서 거의 1000년 동안 존속해온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는 병력이 우세한 적군을 자신이 원하는 지형으로 유인해
함정에 빠뜨림으로써 이길 수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근방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이 꾸준히 증원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방에 야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적군을 유인해 섬멸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전장 중앙 부근에 프라첸 고지라는 감제고지가 있었다. 이 고지의 후방에
자신의 예비대를 은폐시킨 후 약 4만 명의 병력을 적군이 식별할 수 있는 남쪽의 골드바하 강변에 배치했다. 이는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나폴레옹의 미끼였다. 동맹군 총사령관이던 러시아의 쿠투조프 장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병력이 곱절로 많은 것처럼 오판케 하여 선제공격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예상은 적중했다. 1805년 12월 1일 야간에 몰래 부대의 주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킨 러시아군이
이튿날 새벽에 선제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총공세는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아우스터리츠 평원에서 벌어졌다. 오전
9시쯤 평원에 낮게 깔려 있던 안개가 태양 빛에 말끔히 걷히면서 나폴레옹의 작전술이 진가를 발휘했다. 공격명령 신호가 떨어지자 그동안 프라첸
고지 후방에 웅크리고 있던 프랑스군이 안개를 뚫고 홀연히 나타나서 신속하게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고 러시아군을 양분했다. 이후 나폴레옹군은 남과
북으로 분리된 러시아군을 각개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뒀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약 2만7000명의
병력과 180여 문의 대포를 잃었다.
황제 등극 1주년에 거둔 빛나는 승리로 나폴레옹은 명실상부한 대륙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한 후 오스트리아는 대불동맹에서 이탈했고 그 자리를 프로이센이 채웠다. 하지만 18세기 중엽 이래 불패의 신화를 자랑해온
프로이센군도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한껏 고조된 나폴레옹의 승기를 잠재울 수 없었다. 오히려 이듬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참패한 프로이센은
수도 베를린이 점령되는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섬나라 영국만이 홀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대항할 뿐이었다. 이처럼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의 백미(白眉)로서 이후 10년 동안 지속될 나폴레옹 제국의 서막을 여는 이정표가 됐다.
포신에 드릴로 구멍 뚫는 ‘포구 천공법’ 기술 혁신
포신·구경 줄이는 경량화까지… 보병과 보조 척척
기병 조직개편·‘혼합형’ 전술대형 적용도 큰 역할
아우스터리츠 전투 전날 군대 야영지를 방문한 나폴레옹. 출처=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
■ 무기와 무기체계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를 어떻게 운용했기에 그토록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그가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데 활용한 무기발달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천재적 군사전략가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군의 군사전통과 무기체계를 모체로 자신의 군사적 창의성을 발휘했다. 18세기 중엽
이래로 추진된 군 개혁을 통해 프랑스군의 전력이 향상되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그 성과를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포의
기동성을 높여서 집중 배치를 통한 화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대포의 체계적인 운용이야말로 나폴레옹 전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 자신
포병장교 출신답게 대포의 중요성을 십분 인식하고 전술적으로 전진 배치해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는 등 창의적으로 운용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프랑스혁명 이전부터 이어져온 발전을 나폴레옹이 적극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병에 관한 한 프랑스군은 주변 열강들에 비해 혁명 이전부터
선진화돼 있었다. 7년전쟁(1756~1763)에서 참패를 한 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군 개혁과 기술 진전 덕분이었다.
특히 ‘포구
천공법(穿孔法)’이라는 기술혁신이 대포 발전의 돌파구 역할을 했다. 1740년경 장 마리츠(Jean Maritz) 부자(父子)는 포신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포구를 제작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 신기술 덕분에 동일 구경의 대포 제작이 가능해짐으로써 전술적 일제사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포의 무게를 줄일 수 있게 되면서 기동성이 향상됐고 덕분에 야전에서 공격용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 그리보발 장군의 대표 견인 모습. |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진전이 진정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물이 필요했다. 그는 바로 7년전쟁에서 프랑스 군 포병
장군으로 활약한 바 있는 그리보발(Gribeauval, 1715~1789)이었다. 그는 1765년 이래 포병 감찰관으로 재직하면서 다방면으로
포병 개혁을 추진했다. 대포의 포신과 구경의 크기를 줄이는 경량화 작업으로 포병대의 기동성을 높였다. 대포 이동에 필요한 운반용 포차의 수레바퀴
및 포가(砲架)를 개량하고 견인 방식도 두 줄로 끄는 말로 대체했다. 포탄도 12·8·4파운드의 무게로 통일해 발사속도를 단축하고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표준화 및 기동성 향상 덕분에 포병대는 작전 시 보병과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그리보발의 군사개혁은 단순히
기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군 조직상의 변화로 이어졌다. 우선 군사작전 시 민간인에게 위탁해 온 대포 이동을 군 병력이 직접 하는 체제로
변경했다. 대포 발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포병 병사 훈련을 체계화했다. 이제 포병은 과거의 보조적 위치에서 벗어나 보병 및 기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병과로 올라섰다. 이러한 기존 개혁의 바탕 위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전술적 감각과 지휘방식을 더해 전투력을 배가했다. 그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후 다수의 대포를 집중 운용해 본격적 접전 이전에 적의 대형을 와해시킴으로써 아군 보병대의 진격을 용이하게 했다.
18세기 프랑스군의 대포. |
당시 나폴레옹 군대가 무장한 보병용 무기는 17·18세기에 사용된 소화기와 유사한 머스킷 소총이었다. 전장식 실탄 장전
방식에다 격발은 부싯돌을 때려서 발화시키는 수발식이었다. 고로 격발을 위해 부싯돌을 수시로 교체해야 했고, 화약의 질이 나빠 간혹 총신 자체가
망가지기도 했다. 사격속도도 숙달된 사수가 분당 2발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렸고, 유효사거리 약 180m에 오차 범위는 거의 3m에
달했다.
기존 개혁 작업의 토대 위에서 나폴레옹이 이룩한 업적들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주변 열강의 군대보다 우월했던
점은 빠른 기동성과 전술대형의 융통성에 있었다. 기동성 향상을 위해 그는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를 기존 분당 70보에서 120보로 늘렸다. 덕분에
전투 개시 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대세였던 선형의 횡대대형 일색에서 벗어나 필요시에는 종대대형을 유지했다. 전장의
지형과 상황에 따라 적의 공격을 견제하는 부대는 횡대로, 적군의 취약한 부분을 집중 공격해 돌파하는 부대는 종대로 배치하는 ‘혼합형’
전술대형으로 병력 운용의 융통성을 높였다.
나폴레옹은 기병의 역할에도 변화를 가했다. 정찰 및 엄호라는 기존의 보조적인 임무에서
벗어나서 기병의 장기인 속도감을 살려 전투 초반에 적진으로 돌격, 적군의 대형을 교란하는 임무를 부과했다. 이를 위해 그는 기병의 조직을 개편해
경장기병은 새로 편제된 사단(6000~9000명)에 포함시키고, 중장기병은 독립부대로 편성해 전투 시 적진 돌파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부대의 제 분야에 변화를 가했다. 효과적인 병력 운용을 위해 독립적으로 운용돼 온 보병·포병·기병을 1개
사단으로 혼합 편성하고, 2~3개 사단을 합해 군단을 만든 후 군단장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부대를 이용해 그가 구사한 작전술의
핵심은 기동과 집중이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휘권을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실행을 꾀했던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보병. |
■ 의미와 교훈
나폴레옹의 군사작전을 통해 이제 전쟁의 성격은 제한전쟁에서
섬멸전쟁으로 바뀌었다. 그는 프랑스혁명 와중에 제정된 징병법을 통해 엄청난 규모로 증가한 국민군을 이용,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펼쳤다.
근본적으로 그의 전략전술은 적군을 격퇴하는 선에서 머물지 않고 이를 추격해 섬멸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이를 위해 그는 부대의 기동성을 높이고
이를 토대로 접적 전에 적군 퇴로 차단을 시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천착한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전략의 핵심으로 적군의
‘무게중심’을 타격하고 와해시키는 ‘섬멸전’ 개념을 제시했다. 20세기에 본격화되는 총력전 시대를 암시하는 새로운 전쟁 개념을 던져 놓고서
나폴레옹 자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셈이다.
무기발달사적 측면에서 볼 때,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신형 무기가 등장했거나 무기의
위력이 크게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개발된 무기를 전략전술과 연계해 적절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포를 집중 운용해
접전 초기에 적의 대형을 와해시키고 전투력 소모를 강요함으로써 아군 보병부대의 원활한 작전 수행을 가능케 했다. 그는 화약 사용 이래 개별적으로
발전해 온 군사연구의 제반 요소들을 통합하고, 이를 머스킷 소총과 활강식 대포라는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통해 실현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은 다양한 부류의 병과와 병력을 통합적으로 구사하는 전쟁 방식을 완성한 인물이었고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였다.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