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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 속도 빨라 전세 뒤집은 ‘비장의 무기’ / 프로이센군 인명 손실 1만 명 미만 비해 / 오스트리아는 전상자 4만 명…결국 항복 / 독일통일을 향한 굳건한 디딤돌 계기 돼
프로이센군의 드라이제 소총 |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던 오스트리아와의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독일 통일의 디딤돌을 놓았다. 그림은 쾨니히그라츠 전투를 묘사한 모습. 필자 제공 |
독일통일 3걸-비스마르크, 론, 몰트케(왼쪽부터).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하 보오전쟁)은 1866년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신흥 강국 프로이센과 전통적 터줏대감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1848. 5) 이래 전개된 통일 주도권 경쟁에서 다른 열강들은 전통 강대국 오스트리아의 절대적 우위를 당연시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독일 북쪽 변방국가 프로이센에는 비스마르크라는 걸출한 정치가와 몰트케라는 탁월한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일대 결전을 벌여 승리하면서 독일 통일을 향한 굳건한 디딤돌을 놓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쾨니히그라츠 전투(1866. 7)였다.
■역사적 배경
중세 말 이래 점진적으로 통일국가를 형성해온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국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늦게나마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혈통·언어 등을
공유하는 ‘동질적 집단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영향이 컸다. 19세기 후반기에 외세의 지배나 간섭으로 분열돼 있던 주민들의 민족의식이
형성 및 분출되면서 통일국가를 향한 열망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동안 주변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방해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던 독일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주변 열강들은 유럽의 중앙부에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등장해 기존 세력균형에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봐
항상 독일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독일 지역은 베스트팔렌조약(1648) 이후 지방세력가들이 지배하는 300여 개의 군소
영방국가(領邦國家)로 분열된 채 상호 반목과 대립을 거듭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독일 땅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독일 지역 침공에 이어서 프랑스 2월혁명(1848. 2) 성공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1848년 5월 소집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긴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 됐다. 하지만 회의는 순조롭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통일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표출됐다.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게르만족만의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팽팽하게
맞섰다. 예상 외로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표결에서 이겼으나, 당사국 프로이센 국왕의 거부로 민의(民意)를 통한 통일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점차 토론이나 표결이 아니라 무력을 통한 통일을 외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됐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였다. 1862년 빌헬름 국왕에 의해 프로이센 수상으로 발탁된 그는 군대 정예화 및 장비 선진화를
기치로 내걸고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그는 장차 독일통일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즉 ‘철(鐵)과
혈(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의회에서 군비증강 예산을 확보한 비스마르크는 그 실천 책임을 국방상 론과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von Moltke)에게 맡겼다. 이들이 추구한 통일 방식은 한마디로 통일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1864년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서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지방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곧이어 1866년 전통 강국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독일의 장래를 건
일전을 벌였다.
■전개 과정
1864년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덴마크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는 곧 그 총부리를 영원한 적수, 오스트리아로 돌렸다. 덴마크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영토의 분할을 둘러싸고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자극해 먼저 전쟁을 도발하도록 유도했다. 전쟁 발발 시 예상은 제반 측면에서 프로이센에 불리한 형세였다. 원래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프로이센에 비해 월등하게 우세한 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설상가상으로 프로이센은 그 영토가 하노버와 작센 공국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돼 있었다. 또한 수도인 베를린 방향으로 보헤미아의 영토가 펼쳐져 있어서 여차하면 오스트리아군에게 국가의 심장인 베를린이 짓밟힐
수도 있었다.
이것이 객관적 상황이었지만 예로부터 불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이를 역전시키는 것은 위대한 인간들의 역할이었다.
당시 프로이센에는 부국강병의 조타수인 비스마르크와 그의 비전을 군사력으로 실천한 몰트케 참모총장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군 특유의
임무형 지휘와 일반참모제도를 정립한 장본인인 몰트케는 전쟁 발발 직후인 1866년 6월 말경 신속하게 프로이센의 1개 야전군을 동원해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던 하노버와 작센 공국을 점령했다. 동서로 분열된 프로이센의 영토를 하나로 잇기 위한 조치였다.
넓게 보아
양국의 전쟁은 남부의 이탈리아 전장, 서부의 하노버-작센 전장, 그리고 북부의 보헤미아 전장 등 세 곳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 중 전쟁 승패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북부의 보헤미아 전장이었다. 1866년 6월 몰트케는 총 5개의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해 3개 야전군을 작센 공국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 지방(오늘날 체코)으로 이동시켰다. 철도망 미비로 단일 철도노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내선(內線)작전이라는 결정적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작전의 주도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7월 초 이동을 마친 양군은 보헤미아의 프라하 동쪽 50마일에 위치한 쾨니히그라츠 요새 부근에서 맞닥뜨렸다.
오스트리아의 북군 사령관 베네덱 장군은 약 20만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쾨니히그라츠 평원에서 접전 당시에는 12만4000여 명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의 제1야전군과 충돌하게 됐다. 결과는 제2야전군(약 9만7000명)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두 방향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게 된 프로이센군의 대승이었다. 물론 프로이센군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계속 우세를 점한 것은 아니었다. 접전 초기에는 우월한 포병 화력을
앞세운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으로 거의 후퇴 일보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 훈련으로 다져진 장병들의 굳건한 정신력과 프로이센군의 비장의
무기인 후장식 라이플소총의 도움으로 전세를 뒤집고 승리할 수 있었다.
1866년 7월 3일 하루 동안 프로이센군이 1만 명 미만의
인명 손실을 입은 데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약 4만 명의 전상자를 냈다. 포로가 된 병력도 거의 2만 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오스트리아군은 이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전쟁 발발 7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해 8월 말 양국이 프라하조약에 서명하면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찍이 클라우제비츠가 예견했듯이 단지 한두 번의 결전을 통해 프로이센은 전통적 숙적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독일통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 신화의 시작
철도의 군사적 잠재력 주목한 이 장교
참모총장 오르자 군 수송에 즉각 활용
몰트케가 주는 교훈
철도망·전신선·드라이제 소총
프로이센군 선진화 일군 3요소
불리한 시·공간 극복하고 승전
전쟁에서 이길수 있는 요건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목표 정하고 줄기차게 추진하는 '창조적 소수자의 존재와 역할
보오전쟁 모습. |
보오전쟁 모습. |
■ 무기와 무기체계
주변 열강의 예상을 뒤엎은 프로이센의 승리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에 참패를 당한 이래로 프로이센군은 절치부심하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국방력을 강화시켜
왔다. 산업혁명의 확산과 더불어 빠르게 발전한 당대의 과학기술을 무기 개발에 적극 응용해 신형 소총과 양질의 대포를 개발했다. 무엇보다도 철도로
병력을 수송하거나 전신을 활용해 장거리 통신망을 구축하고 군사작전 수행 시 적절하게 활용했다.
앞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 발발 이전에 프로이센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에는 특히 공간적으로 매우 불리한 형세에 있었다. 하노버와 작센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영토가 동서로 양분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트케는 후장식 라이플 소총, 철도, 그리고 전신(電信)이라는 세 가지
과학기술상의 발전을 활용해 결과적으로 취약점을 극복하고 독일통일 달성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1835년 최초로
독일에서 증기철도가 개통됐을 때, 프로이센군 지도부는 철도의 향후 가능성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제반 제약사항으로 인해 초창기 철도의
수송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에는 철도의 군사적 잠재력을 내다본 선견지명을 가진 한 장교가 있었다. 바로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다. 그는 청년장교 시절부터 철도의 엄청난 수송능력과 이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는 마침내 1858년 그가 프로이센군 참모총장 직에 임명됐을 때,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됐다.
몰트케는 병력의 동원 및 이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국가의 철도 운용을 체계화했다. 이제 모든 화물열차들은 전시에
군인과 말(馬), 그리고 여타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춰야만 했다. 전시 철도수송을 총괄적으로 지휘 및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할 특별
철도부서가 참모본부에 신설됐다. 인접한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전체 병력 규모에서 열세였던 프로이센에게 철도를 이용한 인원과 물자의 신속한
이동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그 자체로는 무해(無害)한 철도 운송은 19세기 후반기에 점차 전쟁 수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는 시간·공간·힘이라는 전략의 3대 요소 중 특히 시간 요소를 크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빠르게 이동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상부의 명령을 예하부대에 하달할 수 있었을까?
당시까지 거의 모든 군대는 일정한 공간적 범위 내에서만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병 전령을 활용해 지휘관의 명령을 빠르게 하달하기도
했으나, 이것 역시 백 퍼센트 믿을 만한 수단은 아니었다. 이때 몰트케는 전신의 군사적 활용에 눈을 돌렸다. 당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전신이
참모본부와 최전방 전투사단 사이에 즉각적인 정보교환을 가능케 했다. 철도망을 따라 길게 늘어선 전신선 덕분에 프로이센군은 보다 광활한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부대를 지휘 및 통제할 수 있었다. 더구나 몰트케는 이러한 통신의 발달로 상급지휘부에서 전장의 사소한 사항까지 간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무형 지휘'라는 독일군 특유의 부대 지휘 방식을 병행해 강조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만일 프로이센군의
선진화가 철도와 전신에만 머물렀다면,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랄까, 여기에 결정적인 하나가 더해져야만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철도와 전신은 병력을 멀리 이격된 전장까지 신속하게 배치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 것은
적군과 대면한 각개 병사들의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 군의 기본화기는 기술적으로 내세울 만한 진전이
없었다. 화승총 발명 이래 격발장치의 개량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왔으나 병사들은 16세기 이래 줄곧 전장식(前裝式)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짧은 유효사거리와 낮은 명중률 때문에 전투 시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만큼의 치명타를 날릴 수 없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
프로이센군은 당대의 신형 화기인 후장식(後裝式, breech loading) 강선(라이플)소총을 군의 개인화기로 채택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발명자의 이름을 따 '드라이제 소총'으로 알려진 이 신형 소화기는 격발 시 탄환의 뇌관을 때리는 장치가 뾰족한
바늘 모양인지라 일명 '니들건(needle gun)'으로 불리기도 했다. 때마침 개발된 '미니에 탄환'을 적용한 이 신형 소총 덕분에
프로이센군은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사격할 수 있었다. 예컨대 구식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이 1발을 사격할 때 프로이센군은 무려
6발을 보다 멀리까지 사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후장식인 터라 엎드린 자세로 장전이 가능했기에 직립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1840년대부터 점차 프로이센군에 도입된 드라이제 소총은 1866년에 이르러 마침내 현역과
예비역 전체를 망라하는 모든 프로이센 보병 병사의 기본화기가 됐다.
프로이센군의 드라이제 소총. |
■ 의미와 교훈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물결이
유럽 대륙으로 전파돼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그 영향이 각 분야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업화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물결 앞에서 군사적
측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산업화가 전쟁에 미친 영향은 기본적으로 기술발전을 통한 무기의 개량과 대량생산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철도와
통신수단의 발달을 통한 전쟁 수행 방식의 혁신이었다. 무엇보다도 엄청난 규모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을 군대와 군수산업 분야로 흡수해 대규모 군대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결과적으로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무의미해졌고, 이제 전쟁은 단순히 군인만의 임무가 아니라 해당 국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과업이 됐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 즉 총력전(Total war)의 가능성이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간파하고 이를 부국강병으로 연결시키는 주체는 단연코
여전히 인간임을 쾨니히그라츠 전투는 재차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즉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처럼 목표를 정하고 이를 올곧고 줄기차게,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토록 추구하는 '창조적 소수자'의 존재와 역할이 시공을 초월해 전쟁 승리의 핵심 요건이라는 점이다.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