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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5000명으로 5만 명에 대승 / 정예 이슬람 전사 1만여 명 사망
영국군 인명 손실 48명에 불과 / 전투라기보다 '살육'에 가까워
옴두르만 전투 접전 광경. 필자 제공 |
영국군 기관총부대. |
영국 키치너 장군. |
칼리파 압둘라히. |
19세기 중엽 이래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진출해 20세기 초까지 이들 지역의 대부분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유럽 군대와 원주민 군대 간에 수많은 충돌이 벌어졌는데, 그중 양 진영 간의 군사력 및 무기체계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1898년 9월 초 아프리카 동부 수단의 옴두르만(Omdurman)에서 키치너 장군의 영국군과 마흐디의 이슬람
원주민군 간에 벌어진 전투였다.
● 역사적 배경
19세기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린 시기였다. 특히 19세기 후반기에 유럽 열강들은
별다른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양 제국주의 군대가 식민지 원주민군에 항상 승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제국주의 시대에 벌어진 무력충돌에서 대부분의 경우 서양 군대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다. 이러한 경향은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군사적 승리를 토대로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을 무자비하게 분할 점령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팽창
시대의 대표주자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지표면의 5분의 1에 달하는 면적을 지배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세계 지배의 원천을 식민지 원주민들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에서 찾곤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쌍방 간 무기체계의 현저한 격차에 있었다. 즉, 유럽 군대는 우월한
화력(firepower)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원정군이 안고 있던 각종 취약점―보급의 어려움, 낯선 기후와 풍토병, 현지 지형에 익숙한 적군의
게릴라 전법―을 극복하고 토착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키치너(Horatio H. Kitchener) 장군 인솔하에 1898년 나일 강 상류의
수단 옴두르만으로 파병된 영국군은 후장식 라이플 소총, 맥심기관총, 그리고 경(輕)야포로 무장했다. 이에 비해 상대방 칼리파 군대는 인원은 수만
명에 달했으나 재래식 근력무기와 기껏해야 전장식 머스킷 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진출 배경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뤄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배경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무엇인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서양의 제국주의
팽창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팽창을 가능하게 해준 수단에 대한 고찰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반 방식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시 서양의 우월한 과학기술 특히 무기체계와 관련된 군사기술이다.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1898년 9월
2일, 동부 아프리카 수단의 하르툼 인근 옴두르만에서 키치너 장군 휘하의 영국군과 이슬람 신비주의자 마흐디를 계승한 칼리파(Khalifa)
압둘라히의 군대가 충돌한 옴두르만 전투였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정규군과 수단의 원주민 군대 간에 벌어진 일대
결전이었다.
● 전개 과정
1898년 9월 1일 키치너 장군은 영국인과 이집트인 혼성군을 인솔하고 하르툼으로부터 나일 강을 횡단해
수단의 옴두르만에 도착했다. 그는 2만 명 이상의 병력과 야포 및 맥심기관총을 장착한 10척의 소형 포함(砲艦), 그리고 보급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약 5만 명의 수단인 원주민들로 구성된 마흐디의 과격파 이슬람교도 부대가 무려 4마일에 걸쳐서 전투대형을 형성하고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옴두르만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래 '인도에 이르는 최단
통항로' 확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국 정부는 때마침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계기로 1882년 그곳을 아예 식민지화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가 통치하고 있던 수단 지역이 자동적으로 영국의 지배권으로 편입됐다. 때마침 수단에서는 그동안 쌓인 불만이 극에 달해 무하마드 아미드라는
이슬람 지도자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급기야는 1883년 수단 전 지역을 장악한 반란세력에 의해 수단 주둔 이집트군(약 1만 명)이 포위
상태에 놓이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병된 영국군이 반란군에 포위되고 급기야 1885년 1월 지휘관 고든(Charles
Gordon) 장군이 살해되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제반 이유로 토벌을 망설이고 있던 영국 정부가 마침내 1896년 군대 파병을 결정함에 따라
당시 식민지 이집트군 총사령관이던 키치너 장군이 그 임무를 맡게 됐다.
가장 큰 문제는 칼리파의 세력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나일 강 상류의 옴두르만 지역까지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일이었다. 철도를 새로 부설하는 악전고투 끝에 난제를 극복한
키치너는 마침내 1898년 9월 초 약 2만5000명의 영국군을 옴두르만 북쪽의 나일 강둑 언저리에 배치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사막 지역의
가시덤불을 이용해 약 1500m에 달하는 반원형의 방어벽을 구축했다. 방어벽 안에 앉고 서는 자세로 2열 횡대 대형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적당한
간격으로 대포와 맥심기관총을 설치했다. 무엇보다도 영국군은 부대 진지 후면의 나일 강에 화포와 맥심기관총으로 무장한 소형 포함들을 띄워놓고
있었다.
영국군과 대치한 칼리파 압둘라히의 이슬람 군대는 약 5만 명 규모에 보병과 기병이 섞여 있었다. 주 무기는
창과 칼, 그리고 방패 등 근력무기였으나 이들 역시 1만여 정의 소총과 50여 문의 대포 등 상당량의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화약무기는 구식인 데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선방을 날린 것은 영국군이었다. 9월 1일 영국군은 나일
강의 포함에서 옴두르만 시내의 마흐디 무덤에 포격을 가했다. 예상과는 달리 적군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는 채로 당일 하루가
지나갔다.
전날의 포격에 별 반응이 없었던 칼리파군이 이튿날 오전부터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먼저 약 4000명에
달하는 흰옷 차림의 이슬람 근본주의자 결사대를 필두로 엄청난 수의 이슬람 전사들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영국군 진지 앞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영국군 진지 정면 300m에 이르기도 전에 최신형 소총과 맥심기관총의 총탄세례를 받고 전멸하고 말았다. 5시간에 걸친 총격전은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살육'에 가까울 정도로 영국군의 대승이었다. 칼리파군은 1만여 명이 죽은 데 비해 영국군의 인명 손실은 고작 48명에
불과했다. 불과 5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당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무장돼 있던 칼리파의 군대가 궤멸된 것이었다.
산업혁명 산물 '살육기계'… 부메랑 되어 돌아오다
19세기 화약무기개발 분야 눈부신 발전 이뤄
라이플소총·기관총으로 아프리카에선 쉽게 승리
유럽 열강, 제1차 세계대전 때 대량살상 원인
옴두르만 전투에서의 이슬람 마흐디 부대. 필자 제공 |
맥심기관총(1895년형) |
스나이더-엔필드 라이플총? |
● 무기와 무기체계
이토록 엄청난 인명피해의 차이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양측의 현격한 화력 차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군의 훈련 정도 및 보급상태, 그리고 병력 및 화력운용 측면에서
양측의 총사령관 격인 키치너와 칼리파가 발휘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 차이 등을 승패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설령 이러한 점들을 인정한다 해도
병력은 적군의 절반에 불과한 데다 현지 지형에도 익숙하지 못한 영국군이 이토록 대승을 거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옛날 방식대로 칼과 특히
창을 주 무기로 무장한 칼리파군에게 후장식 라이플총, 맥심기관총, 대포 등 서구 산업혁명의 산물로 맞선 것이 가장 중요한 승인(勝因)이었다.
특히 기관총은 끊임없이 총알을 토해내는 가공할 '살육기계' 그 자체였다.
유럽과 아프리카 간의 이러한 격차는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바로 19세기 중반 이래 유럽에서 이룩된 화약무기 개발이 그 이면에 놓여 있었다. 서양 역사에서 19세기만큼 화약무기 분야에서 빠른
발전이 이뤄진 시기는 없었다. 특히 장전의 용이성, 사격속도 및 명중률 향상, 그리고 사거리 신장 등에서 놀라운 진전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신형
화기로 무장한 집단과 그러지 못한 집단 간의 전투력 격차는 더욱 커졌다. 특히 후장식 소총 및 기관총이 빠르게 보급되고 있던 19세기 말에
이르면 창이나 칼과 같은 근력무기 및 서양에서 폐기된 구식 화약무기로 무장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결코 유럽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이 시작됐으나 서유럽에서 화약무기의 비약적 발전은 1840년대에 이르러 가시화됐다.
그 이전까지 유럽 군대의 표준 개인화기는 전장식에다 활강 총열을 갖고 있던 수석식 머스킷이었다. 영국에서 브라운 베스(Brown Bess)로
불린 이 소총은 1704년 블렌하임 전투 이래 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돼 왔다. 이는 50야드(약 46m) 거리에 있는 표적은 명중시킬 수
있었으나 80야드(약 70m)를 넘으면 거의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성능이 떨어졌다. 또한 전장식인지라 장전을 위해서는 일단 일어서서 1분가량
소요되는 복잡한 연속동작을 취해야만 했다.
19세기 초반 격발 점화장치가 개선되면서 총기제작 분야의 장기간에 걸친
답보상태에 돌파구가 마련됐다. 1807년 스코틀랜드의 포사이스(A. Forsyth)는 강한 충격을 가할 경우 폭발하는 뇌산염을 특허 출원했다.
이를 약실 팬에 놓고 망치로 때리면 성냥이나 부싯돌 없이도 점화 화약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유럽
각국은 성능이 더 좋은 개인화기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프러시아가 '니들건'이라 불린 후장식 라이플소총을 개발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총탄을 개선하는 방향에 관심을 집중했다. 1848년 프랑스군의 미니에 대위는 발사되면 원추형 탄환의 꼬리 부분이 확장되어 총신의 강선에 꽉
들어맞는 신형 탄환을 발명했다. 일명 '미니에(Minie) 탄환'이라고 불린 이 신제품 덕분에 라이플총의 장전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개량된 소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량생산 시스템 역시 도입됐다. 공작기계의 발달로 소총의 제반 부품에
대한 표준화가 이뤄져 필요시 교체가 가능하게 됐다.
1851년 런던 수정궁에서 제1회 세계박람회가 개최됐을 때,
영국 관리들은 박람회장에 전시되어 있는 미국제 무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영국 정부는 엔필드(Enfield)에 조병창을 신설해 '미국식
시스템'으로 알려진 소총의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었다. 1853년 첫 제품이 출시된 전장식 엔필드 라이플총은 유효사거리가 800야드(730m)에
달할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1860년대 중반에는 여기에 미국인 스나이더(J. Snider)가 발명한 노리쇠뭉치를 장착해 후장식
소총으로 개량했다. 일명 스나이더-엔필드 라이플총으로 알려진 이 혼합형 소총은 1867년 이래 영국군의 기본 병기가
됐다.
소총에 더해 식민지 전쟁에서 무서운 성능을 발휘한 무기는 기관총이었다. 최초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선보인 개틀링
기관총은 사수가 직접 총신 회전용 핸들을 돌려야만 하는 수동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격속도도 느리고 무엇보다 작동에 많은 불편이 뒤따랐다. 이
난제를 해결한 인물은 1884년 자동식 기관총을 발명해 이후 '기관총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맥심(Hiram Maxim)이었다. 그는 총탄이
발사될 때 발생하는 가스의 반동력을 이용해 연속적으로 자동장전이 가능한 기관총 제작에 성공했다. 무게 60파운드에 3명 1개조로 운용된
맥심기관총은 라이플총 100여 정의 화력에 버금가는 분당 최대 600발의 발사속도를 자랑했다. 1890년대에 식민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맥심기관총은 자타가 인정하는 전쟁 승패의 가장 결정적인 무기였다.
무기상의 현격한 차이가 비단 육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해군은 유럽 열강과 식민지 간의 격차가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 해군 분야에서는 1814년 최초로 등장한 증기추진 군함이
기술혁신을 선도했다. 초기에 증기군함은 선체의 좌우에 설치된 외륜(外輪)형 수차로 움직였으나 1840년대에 이르면 프로펠러형 스크루를 장착해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또한 함포를 장갑으로 덮고 포탑을 회전식으로 개량해 사격 반경을 대폭 늘렸다. 1860년대에는 후장식 강선대포를
장착해 원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더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었다. 옴두르만 전투 시 강에 정박한 채 칼리파군을 향해 기관총과 경야포를 발사, 영국군
승리에 일조한 소형 포함(砲艦)도 바로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것이었다.
● 의미와
교훈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인과 아프리카 원주민 간에 벌어진 충돌은 전력 측면에서 역사상
가장 비대칭적인 경우의 하나였다. 전자에게는 전쟁이라기보다 사냥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었던 데 비해 후자에게는 두렵고 가망 없는 투쟁이었다.
후장식 소총에 더해 1890년대에 식민지 주둔 영국군에 맥심기관총과 속사형 경야포가 배치되면서 유럽 군대와 식민지 원주민 군의 전력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하지만 유럽 군대가 거둔 일방적 승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후 유럽인들에게 독소(毒素)로 돌아왔다. 식민지
전쟁이 주는 교훈을 경시한 결과, 유럽 열강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서부전선에서 대량살상을 감내해야만 했다. 후장식 라이플소총이나 기관총은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충돌에서는 유럽 군대에 손쉬운 승리를 안겨줬으나, 제1차 대전과 같은 유럽 열강들 간의 싸움에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끝자락에서 원주민 부대를 상대로 유럽 군대가 자행한
'살육전의 미몽(迷夢)'이 일종의 부메랑이 되어 유럽인들 자신에게로 날아왔던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충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담고 있는 교훈을
무시한 채 승리에 도취해 자만과 과신에 빠질 때, 패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수 있음을 옴두르만 전투는 암시해주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