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3 시사저널에 게재한 칼럼입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2019년 한국경제에 주는 교훈
1997년 IMF사태를 영화화한 “국가부도의 날”을 보았다. 영화는 화려한 액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이 없지만 흥행이 성공적이다. 21년전 일이지만 지금의 한국에 유효한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기에 베팅을 해 큰돈을 번 윤정학의 말 “정책당국의 무능”, 온갖 고생 끝에 살아남은 갑수가 영화 끝에 아들에게 하는 말 “누구도 믿지 말라“는 생생한 눈앞의 현실이다. 영화 속의 한국은행 한시현팀장은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당시 한국은행에는 통화정책팀이 없었고 한시현팀장 같은 사람도 없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영화의 전체 흐름은 사실과 거의 부합된다. 국민을 끝까지 속였던 재정국 차관과 금융실장은 노무현정부 이명박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 경제부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현실에 없었던 한시현팀장을 만든 것은 영화의 대립구도를 위해서겠지만, 한국의 정책당국에도 깨어있고 실력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기 위한 것 같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한시현팀장과 같은 사람은 영화처럼 중간에 옷을 벗어야 한다. 계속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천운을 타고 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정책담당자들이 한시현팀장과 같은 생각은 할지 몰라도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IMF사태는 경제의 6.25 사변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
IMF사태는 외환위기와 은행위기가 결합된 심각한 금융위기였다. 거의 모든 금융위기의 이면에는 과다부채가 있다. IMF사태도 예외는 아니다. 대기업들의 과다 차입에 의한 무리한 투자와 금융기관들의 위험관리 실패가 일차 원인이다. 1996년 GDP대비 투자비중은 36%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고, 기업의 수익성과 현금흐름은 나빠졌다. 은행은 사업성 보다는 기업의 규모나 권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대출을 결정하였다. 여기에다 경상수지 물가 환율 등 거시경제의 불균형도 심각했다. 1996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230억달러로 GDP의 4.1%에 달했다. 소비자물가는 연 5%정도 상승하였다. 원화의 가치가 떨어져야 했으나 환율은 비정상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했다. 1997년 IMF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정책당국자들이 수없이 이야기했던 한국경제의 펀더멘탈은 튼튼하지 못했다. 정책당국자들은 무능했을 뿐 아니라 정직하지도 못했다.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4마리용으로 불리며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가 좋았다. 주변에 있던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도 경제가 덩달아 좋아졌다. 많은 외국인투자가 몰려 호황이 장기화 됐다. 1996년경부터 외국인투자자들은 차입자인 기업과 금융기관의 상환능력을 의심하고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고, 1997년에 들어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먼저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한국은 1997년 1월 한보의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진로, 5월 대농에 이어 삼미 기아 등의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하였다. 2월에 이미 일본계 금융기관은 한국에 대해 만기연장과 신규 대출을 제한하였다. 신용평가사들은 1997년 4월부터 한국 금융기관과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였다. 외환위기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1997년 8월에는 국제금융과 위험관리의 능력이 전혀 없던 종합금융사들이 먼저 외화유동성 부족사태에 빠졌다. 이어 은행들도 외화조달이 불가능해져,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 지원으로 버티게 되었다.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감소하여 1997년 11월에는 국가부도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대로 11월 16일에는 미셀 깡드쉬 IMF총재가 비밀리 방한하고, 11월 21일 공식적으로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12월 3일 IMF와 자금지원 협약을 체결하여 IMF체제가 시작되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듯이 IMF의 지원도 많은 조건이 있었다. 첫째 강력한 통화 재정의 긴축과 고금리 고환율 정책이고, 둘째는 조속하고 과감한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셋째는 무역 외환의 자유화와 금융시장 개방, 넷째는 회계기준과 금융감독 기준을 국제모범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의 중요 정책인 광범위한 부동산 부양은 한국정부가 스스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에는 위기극복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겪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니 당연하지 않았다.
미국 유럽 등은 한국과 반대로 재정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재정지출을 늘렸고, 정책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낮추었다. 1997년 말 1998년 초의 한국의 고금리는 살인적이어서 멀쩡한 기업까지 수없이 도산했다. 고금리 정책은 환부의 몇 배까지 도려내는 무책임한 돌팔이 의사의 수술법이었다. 환율은 1996년말 844원에서 12월 24일 1965원 까지 상승하였다. 수출기업은 부실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원자재를 수입하는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다.
한국은 2001년 8월 23일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IMF체제를 벗어났다. 위기 극복과정에서 일부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부정적 효과가 많었다. 한국경제는 1997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은 국민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진행된 심각한 양극화이다.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경영진, 관료 의사 교수, 공기업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 좋은 직업과 그렇지 못한 직업 간의 보상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기업부문에서도 대기업과 ICT기업 수출기업 등은 좋아지고, 중소기업 내수기업 등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수도권과 지방, 부동산 보유자와 미보유자 간의 격차도 커졌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구조조정의 칼날이 노동자 중소기업 등 약자에게만 집중되고, 관료 의사 교수 부동산 보유자 등은 특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함께 금융부문의 과도한 개방에 따른 경제 불안정, 경제주체의 보수화 등의 부작용도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IMF 사태의 교훈은 영화 속에 많이 녹아있다. 위기를 잘 이용했던 소수와 거짓말을 했던 정책당국자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금모으기운동을 하고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다수 국민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괜찮은 일자리 부족과 저성장 기조 고착, 소득 불평등, 비싼 집값과 집세,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 등 한국경제의 난제는 누적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여전히 무능하고 믿을 수 없다. 한시현팀장과 같이 능력있고 국민을 생각하는 정책당국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첫댓글 1997년 외환위기가 우리 세대에는 어제 같고, 지금 세대에게는 까마득한 신화처럼 여겨지겠죠. 그래서 세상은 반복되나 봅니다. 지금은 모두가 너무 똑똑한 세상, 그래서 금융시장처럼 내일이 오늘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오늘의 내일을 예측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그러나 결국에는 큰 흐름을 어찌할 수 없다. 사물의 팽창이 있으면 수축은 필연이다. 다만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 생각해 봅니다.
예, 통찰력있는 글입니다. 1997년은 이제 역사가 됐고 돌이켜 보년 너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다음에는 후회하지 않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