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우리 삶에 필요했노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깨달음이며, 이런 깨달음은 고통이 지나간 후에야 찾아옵니다. 고통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더 이상 고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벌을 받는다고 느끼면 즉시 자신에게서 책임을 찾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좌절하게 되고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하느님 심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프랑스 문학가 앙드레 지드는 “건강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마치 여행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과도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한 번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마치 여행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인생과 세상에 대해 작은 부분만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런 작은 부분을 인생 전체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을 너무 쉽게 극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큰 고통은 상실의 고통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따뜻하고 안락한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상실을 경험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어쩌면 끊임없는 ‘잃어버림’ 즉 상실의 연속일지도 모릅니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어릴 적 가졌던 꿈을 잃어버리는 것까지……
상실은 우리가 큰 의미를 부여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때마다 생겨납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만(배우자, 자식, 부모님)없는 세상,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똑 같이 흘러간다는 것이 더 참을 수 없게 합니다.
이별을 겪을 때 마다 가슴속에 작고 하얀 방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 방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의 아주 작은 계기로도 (길을 가다 평소에 즐겨 듣던 음악을 듣게 되거나 좋아하던 음식이라도 마주하게 되면) 그 방의 문은 열리고 우리는 또다시 이별의 순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살아가는 한은 그런 식으로 가슴속에 작은 방들이 늘어 가는 겁니다.“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깊은 상실의 고통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고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대로 버리고 싶으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고통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맞서고 많은 병자를 고치며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고통을 다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도 끝내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우리도 고통을 이겨내는 길을 가리켜준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의미는 하느님의 한없는 연민, 곧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