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한사람을 미워하는 것만큼 영혼에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한사람의 아주 작은 실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무관심에서 시작되기도 하며, 외도로 인한 크나큰 배신감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가족, 친구, 그리고 부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흠집을 내며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 쌓인 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도 모른채 그저 ‘내가 다친 만큼 너도 다쳐야 한다’는 칼날 같은 마음만 남을 뿐입니다. 그 칼날에 가장 많이 다치는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용서라는데 그러면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용서는 잘못을 한 사람에게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가 저지른 잘못이 큰 잘못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 용서는 잘못이나 죄의 성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용서는 분노를 포기하고, 그의 잘못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오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죄를 뉘우치고 보상을 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상대방에게 용서의 조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나한테 사과하면 그만 눈감아 줄 것 같아요.’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상대방이라도 생각하고 조건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태도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런 논리는 용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네가 사과하면 용서해 줄게’라는 말은 ‘5억을 내면 이 집을 당신에게 팔지요’라는 말과 같은 논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원한을 품은 형제가 있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심지어 하느님의 제단 앞에 나아가는 일도 멈추고, 가서 그 형제와 화해부터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먼저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셋째, 용서는 화해가 아닙니다. 용서와 화해를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마다 그와 화해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용서와 함께 화해가 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화해가 불가능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해 주고 싶기는 한데, 용서를 하고 그와 다시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아서 용서를 미루게 될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별개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사실을 용서받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해야 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수를 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