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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만난 난제 중의 하나는 천주교로 인한 박해였다. 한국선교 문제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중국 산동성에서였다. 이때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 천주교인들을 만나서 간단한 한국말과 한국의 사정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개신교에서 성서를 번역할 때에도 천주교 신부들이 저술한 한국어 사전들을 참고자료로 이용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인 천주교인을 어학선생으로 삼아 한국말을 배웠다. 이렇게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오다가,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갈등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접근 방법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 기간의 신·구교의 대립 구도는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선교를 주도하려는 천주교 및 개신교 선교사들 사이의 대립, 둘째, 서양세력에 편승하여 이권을 챙기려는 이들의 등장으로 인한 서양인 적세와 그로 인한 교폐 문제, 셋째, 해서교안으로 대변되는 북부 황해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구교의 대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호 간의 문서를 통한 비방과 비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천주교 선교사와 개신교 선교사의 갈등과 대립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시작된 것은 1889년의 일이었다. 1888년 여름 삼남지방에서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자, 당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주한 프랑스 초대 공사와 3대 공사를 역임, 중국어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8년간 통역관으로 일한 바 있으며, 고종황제로부터 1등 훈장을 하사받은 바 있음)와 천주교 주교 블랑을 중심으로 구호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 개신교 측을 대표하여 언더우드가 구호금을 내고 참여하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연합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이에 개신교 측을 대표하는 언더우드가 위원회에 참여해 개신교 측도 구호금 일정액을 내놓았기 때문에 구호금의 지급 과정에서“우리 교회가 갹출한 금액의 분배가 공평하게 될 수 있도록 신부들의 협조를 기대한다.”며 구호금 지급의 공정성을 건의했다. 이에 선교의 기득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천주교에서는 그와 같은 언더우드의 요청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개신교가 이 좋은 기회를 자신들의 선교 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 쪽에서는 "차제에 개신교 목사들이 그들의 선전을 위하여 이렇듯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함을 명심하여야 한다.”(뮈텔문서 1889-1922, 191쪽)고 경계
하는 태도를 비추었다.
그 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은 이른바‘황성신문 난입사건’과‘종현성당 구타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1889년 4월 14일자‘황성신문’잡보난에 한 부처가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내용의‘불입천교’(佛入天敎)란 기사가
도화선이 되었다. 친(親) 개신교 인사인 남궁억에 의해 발간되고 있던‘황성신문’에 천주교를 비방하는 듯한 기사가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택부(李宅負) 등 천주교 신자 수십 명이 신문사로 쳐들어가 사장 남궁억을 종현성당(현재 명동성당)으로 납치 감금한 뒤“부처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 그 출처를 대라.”고 하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신문사를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결국 남궁억은 그 출처를 밝힌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천주교 뮈텔 신부가 자신은 이 일을 알지 못했고, 문제의 교인들을‘교회법으로 중벌’에 처하겠다고 직접 사과의 뜻을 표시함으로써 무마되었으나, 앙금이 완전히 가실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불쾌한 감정은 그 이듬해 1890년 2월 21일 구호대책위원회를 주도했던 블랑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개신교 측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프랑스 공사관에 문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신교 선교사들의 장례식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조선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겠다
는 경쟁심이 작용했다고 치더라도 프랑스 쪽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도록 한 처사에 대해 개신교 쪽에서는 보통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외국인 선교사들끼리 갈등을 일으키자, 점점 양측 신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겨났다. 이어서 이른바‘진고개 사건’이 터졌다. 1894년 4월 당시 장안에서 화제가 되었던 종현성당 신축현장에 구경을 갔던 아펜젤러의 지도를 받는 개신교 신자 5명과 천주교인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이 사건을 보고받고, 아펜젤러는 곧 뮈텔 주교에게“구주 예수 말씀에 계명의 큰 강령은 천주를 공경하고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라고 하셨거늘 사람 사랑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람 상해하기를 힘쓰니 이 같은 사람은 천주의 계명을 멸시하고 마귀의 종 되기를 낙종하니(즐겨하니) 실로 위하여 유감이옵나이다.”라는 격렬한 항의편지를 보냈다. 이에 뮈텔 주교는 이처럼 과격한 내용의 편지가 정말 아펜젤러가 쓴 것인지 확인한 결과, 그게 사실임이 밝혀지자 크게 격분하여 “그 악당들이 당신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5인은 일반인에게 통행이 금지된 구역에 침입하였고 수위가 저지하자 도리어 그와 다투었으며 또 그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그들이 건축 중에 있는 성당을 단순히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라고 하면서 비난하였다(뮈텔 주교 일기(Ⅰ); 뮈텔 문서 1894-1925 참조). 뮈텔의 답신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가늠하기 어렸다. 하지만 이미 신·구교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이 선교사들이 지도하는 한국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그것이 선교사의 차원을 넘어 신·구교 교인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발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양대인적세(洋大人籍勢)와 교폐(敎幣) 문제
신·구교 선교사들의 대립은 서양인적세와 교폐 문제를 통해 신·구교 교인들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천주교의 경우, 빌렘 신부처럼 한 선교사의 권세가 지방 관청의 권세를 능가할 정도로 커지자 이들 선교사에 의존하려는 한국인들이 등장했고, 천주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권익을 챙기거나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등장했다.
‘당시 천주교 신부 중에는 종교적인 전교뿐만 아니라 기성교인들의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주교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인 태도로 인해 지방 관리들과 마찰이 잦았고, 선교사들의 권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천주교인들 가운데는 선교사들에게 사법적인 처리를 요청하는 기현상이 생겨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반 민중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선교사들에게 호소하거나 법적 소송 문제를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양대인이나 그와 관련된 천주교인들에게 의탁하는 일이 발생했다. 해서교안의 사핵사로 파송되어 그 현장을 목도한 이응익은“저들(한국천주교인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자기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교사(천주교 신부)가 있음을 알 뿐이며, 본국 법률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교사의 명령이 있음을 알 뿐이니 이들은 반국역명지민(反國逆命之民)이라”며 서양 선교사들에 의존하는 양대인 세력을 비판했다.
천주교회가 세속적인 이권에 개입된 청탁까지 받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고, 이 때문에“많은 불량배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양대인의 세력을 믿고 지방 관리를 괴롭게 하는 복잡한 관계로 발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외국인, 더욱이 선교사들은 어디서나 지방 관리와 복잡한 관계를 일으켰다. 선교사를 양대인(洋大人)이라고 존경하게 되고, 그러한 신망을 교인들은 남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민형사(民刑事)가 있든지 그것을 지방 관리에게 가지고 가는 대신 양대인에게 가지고 가서 처결을 받으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방관이 민형사로 처리하려 할 때 자기는 그러한 처결을 받지 않겠다고 강경히 반항하였던 것이다.
천주교와는 반대로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 개인의 이권에 개입하는 일을 피했고, 실제로 개입한 경우도 없었다. 그것은 정부의 선교사들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 놓는 이유가 될 수 있고, 또 한국인 개신교 신자들에게 잘못된 국가관을 심어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해체되던 혼란과 불안의 시기에 민중들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바람막이를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외교적 특권을 누린 천주교 신부들의 정치적인 개입과 이권 개입은 당시 부패한 지방정권에 착취당하는 민중들에게는 탐관오리의 학정을 막아줄 수 있는 은신처가 되었다. 소극적 의미의 은신처 역할뿐 아니라, 외교적 특권을 이용한 선교사들은 지방의 행정이나 소송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무력해진 조선의 관료체계와 마찰을 빚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득이 되는 일을 관철할 수 있었던 교인들은 그 의존의 심리를 더 강화하여 갔다.
이 때문에 황해도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영세 입교함으로써 빌렘 신부의 보호를 얻으려 하였고,‘ 해마다 영세자가 급증하고 예비자가 1,500명에 이르렀고’, 한 번은 200명의 포수가 영세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동리 전체가 집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백낙준 박사는 입교의 동기가 불순한 이들을 가리켜 미끼는 떼어먹으면서도 낚시 바늘에 걸리지 않는 자라는 의미로‘기식신자’(奇食信者, Rice Christian)라고 불렀다. 천주교가 이들에 대해 포용적이고 수용적이며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1901년 9월 장로회 공의회를 열어 교회가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한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를 떠나 오직 복음 전도에만 전념하고, 교인 중 입교 동기가 불순한 자에게는 출교를 명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공식적인 윤허를 받은 가운데 선교를 시작했던 개신교와 반정부 단체로 인식되어 오다 반 강요에 의한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허락을 받고 선교하는 천주교와는 처음부터 접근방법이 달랐다. 더구나 양대인과 같이 천주교를 정치적인 세력으로 발전시켜 단순한 전교 차원을 넘어 이권개입까지 하게 되자 천주교를 보는 일반 민중들의 시각과 개신교를 보는 시각은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개신교도들은 불순한 동기로 입교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노력했고, 천주교에는 교세 신장을 위해 오히려 그 같은 분위기를 조장해 이를 역이용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나면서 민폐는 더욱 확산되었던 것이다.
3. 해서교안(海西敎案)과 신·구교 대립
서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발생한 충돌은 비교적 작은 사건이었기에 수습이 가능했다. 그러나 해서(海西)지방에서 발생한 갈등은 장시간에 걸친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곤 했다. 가장 사건이 많이 발생했던 지역은 개신교가 특히 활발하게 전해졌던 황해도 지역이었다. 황해도 지역의 교회들은 한편으로는 불신자들의 핍박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로부터의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남녀가 함께 모여 윤리와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제사를 없애므로 조상을 내버리고 배척한다며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괴롭혔다. 또한 천주교는 신앙의 도리는 연구하지 않고 외국인이라고 하는 위세와 권력을 가지고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공갈 위협하였다. 천주교인들에 의한 교회의 박해는 불신자들에 의한 박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높았고 지속적이었다. 이 때문에 신·구교 간에 갈등이 심각하게 표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해서교안이었다.
1) 해서교안의 발단
이 해서교안은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에 황해도 일대에서 야기된 천주교 측과 지방관 사이에 각종 소송 문제로 시작되어, 급기야 신·구교의 대립과 충돌로써 비화된 교회사적으로 주목되는 사건이다. 해서교안이란 옹진교안, 장연교안, 신환포교안, 황주교안, 은파교안 그리고 재령교안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 중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과 충돌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교안이 장연교안과 신환포교안이었다.
장연 사건은 1901년 7월에 일어났는데, 이것이 교안으로 확대된 것은 1903년 1월이었다. 소래교회를 비롯해서 지방의 교회들이 놀랍게 성장하자 천주교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개신교를 박해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그 중심에 해서지방, 그 중에도 소래교회가 위치한 장연이 가장 심했다.
소래교회 집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윤오가 타깃이 된 것도 그런 이유로 풀이된다. 사핵사의 보고에 의하면 장연 사건은 1901년 7월 장연 사람
개신교도 김윤오가 향장으로 있을 때 공금을 유출했다고 천주교인 조병길이 김윤오를 본군과 관찰부에 고소하면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조병길이 구속되었고, 풀려난 조병길은 1902년 봄, 법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평리원이 김윤오에게 배상할 것을 판결했으나 그 후 해서 사핵사로 파견된 이응익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아 번복되고 말았다.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당시 황해도 일대에 활약하던 조셉 빌렘(Joseph Wilhelm, 홍석구) 신부가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문제가 더욱 비화되었다. 1903년 1월 15일 신천의 천주교인 안태건(가밀로)을 비롯한 12명의 천주교인이 법부의 훈령과
빌렘 신부의 서찰을 갖고 장연 관청에 난입, 염출한 돈의 반환을 요구했다. 장연 군수는 이 사실을 관찰부에 보고하고 장연교우 여섯 명을 체포했다. 빌렘 신부는 이번 사건이 단순히 한국인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의 법정 대립과 다툼이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입하여 진행된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김윤오가 탐관오리의 앞잡이라면서, 개신교 선교사들을 성토하는 내용의 보고를 교구장 뮈텔(Mutel) 주교에게 보냈다.
“이번 사건은 모두 개신교도들의 착상에 의한 것인데 신부들이 당국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음을 주의해 개신교도들이 위태롭게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원통함을 황주, 장연, 재령에 전염시켰습니다. 관찰사는 김윤오가 향장이었다고 주교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적어도 이미 일 년 전에 향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개신교도들의 생소한 착상이 바로 관찰사의 계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것은 신부들을 모르는 체하고 신부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려 하는 술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항의성 서신은 천주교 측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를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개신교 측에서는 천주교측이 사건 자체를 호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언더우드가 빌렘 신부에게 서신을 보내 김윤오가 구타를 당하고 잡혀간 것이 빌렘 신부의 지시로 천주교인들이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세가지를 조목조목 들어 정중히 항의하고 선처를 요청했다. 첫
째,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김윤오가 아니라 장연 군수이다. 둘째, 만일 김윤오에게 잘못이 있으면 조선 국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셋째, 서경호와 윤제경을 제거해야 일이 해결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불란서 신부와 미국 목사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빌렘 신부 역시 언더우드에게 조목조목 답변을 했다. 첫째, 장연 군수는 도둑질을 하였고, 김윤오는 그것을 도왔다. 둘째, 이들은 해주와 서울에서 모두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을 면제받았다고 하며 활보하고 다니니 교우들이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따라서 언더우드에게 ‘목사는 교우들의 유죄를 선고하겠는가? 아니면 백성들을 배신하고 도둑질을 한 군수와 김윤오의 편을 들겠는가?’라고 반문했다.
1903년 장연교안이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천주교 측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 관리에 대한 불신도 더욱 커졌다. 군수가 책정하는 세금은 불법적인 것이므로 군수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천주교에 대한 관리들의 불신도 증폭되었다.
2) 해서교안과 신·구교의 대립
1902년 5월의‘신환포 교안’을 보면, 천주교인 김형남, 홍병용 등이 신안포에 천주교 성당을 새로 지으면서 개신교도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건축기금을 강요한 데서 발단되었다. 이에 개신교인 한치순, 최종신 등이 반대하고 나서자, 8월 20일에 천주교인 박재환 등 6명이 와서 한치순을 무수히 구타하고 건축비를 빼앗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치순은 1893년 재령군
신환포교회를 설립한 초대 장로로 그 후 재령군 일대에 10여개의 교회를 세운 당시 개신교 영수이자 전도인이었다. 천주교 세력이 컸던 이 지역에 개신교 교세가 확장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성당 건축을 빌미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9월 23일에도 한치순, 정기호와 재령의 개신교도 3명을 불러내 건축기금을 강요했고, 거절하자 이들을 무참하게 구타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관청에 알려졌고, 관청은 이들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체포에 나선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이들을 구속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들을 잡아 천주교 회장에게 끌고 갔다. 사건 자체가 호도되고 진의가 왜곡되자 개신교측이 해주 감영에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해 해주 감영이 가해자 박재환 등 천주교 신자 6명을 체포하도록 지시하고 이들 전원
을 체포했다. 그러나 호송 도중 천주교의 르각(Le Gac, 곽) 신부가 이들을 만나 체포하라는 명령이 잘못되었다며 당장 풀어줄 것을 강요하여 그 자리에서 이들 여섯 명을 풀어 주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믿을 수 있는 문헌에 의하면 르각 신부는 중앙으로부터 체포하는 순검을 체포하라는 공문을 가지고 왔다며 보여 주는 바람에 순검들이 겁을 먹고 이들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전해 들은 개신교 선교사 헌트는, 이를 평양의 마펫에게, 마펫은 서울의 언더우드에게, 언더우드는 미국공사관에 전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미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의 경험이 있었던 터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개입하기를 주저해 왔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더 이상 침
묵할 수만은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코리안 리뷰’(The Korean Review)를 발간하고 있던 헐버트는 “우리는 지난 여러 달 동안 신·구교 간의 분쟁에 대해 침묵을 지켜 왔으나 더 이상 침묵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정보를 기대하고 있는 일반대중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알리고, 천주교회를 비난하고 나섰다. 사태가 천주교 쪽에 불리하게 되자 천주교회 측은 “헐버트는 미국공사 알렌까지도 싫어하는 가장 어리석고 흥분 잘하는 애숭이”라며 개신교와 조선정부를 비난하였다. 또한 빌렘 신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교 측 대변자 빌렘과 신교 측 대변자 헌트가 회담을 갖기로 했는데 헌트가 회담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해주 감영에 소송을 제기했다며 분개했고, 이를 기사화한 황성신문사를 찾아가 명예 훼손을 거론하며 기사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 사건을 두고, 천주교 측은 해주지방의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호도하는 한편 천주교의 교세를 약화시키려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했다(황해도 천주교회사, 91-93쪽).
그런 가운데 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이 신환포에 있었던 소위‘이승혁의 우질사건’이었다. 개신교인 이승혁의 소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어 옆집 천주교도인 김순명의 소가 따라 죽었다. 소가 죽자 김순명은 이승혁의 소가 퍼뜨린 전염병 때문이라면서 배상을 요구했다. 급기야 김순명은 세력 있는 천주교인들을 동원하여 이승혁을 수통기에 달아매고 심하게 매질했다. 이승혁이 사경을 헤매자 이를 들것에 실어 나르다 김형남이 금동곤(금비녀)을 잃어버렸다고 하며 사형을 가하여 금동곤 값을 강제로 받아 내려 했다. 놀란 동리 주민들이 우선 비녀 값 300냥을 거두어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빌렘이 이들을 보호하고 나선 것이다.
한편 이런 사실이 중앙정부에 보고되자, 서울의 외부(外部)에서는 1903년 1월 외교 교섭국장인 이응익을 해서 사핵사에 임명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 수습하도록 해주로 보냈다. 그러나 사건의 조사를 위해 소환명을 받은 천주교 측 신부와 신자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응익은 할 수 없이 프랑스 공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공사관 측 역시 부당한 재판에 응할
수 없노라 밝혀왔다. 결국 이응익은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한채 되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귀국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가 직접 중재에 나서서 사건이 무마될 수 있었다. 이 당시 뮈텔 주교는 관련된 신환포 교우들을 당국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빌렘 신부는 여전히 이들이 관헌들과 개신교도들의 중상모략을 당한 희생자라며 두둔해 주었다. 결국 신환포 교안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낸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지역에 문제가 많이 발생한 까닭은,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이 지역을 서북지방 선교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선교경쟁이 과열되었기 때문이다. 황해도 지역은 개신교의 요람지로서 1890년대에 이미 20여 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뿌리를 내렸다. 천주교회는 1895년에 비로소 빌렘 신부가 안악에 정착하면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빌렘 신부가 처음 부임할 때에 6백 명을 넘지 못했던 교세가 1902년에 들어서면 거의 7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두섭 마을의 경우에는 주민이 모두 개신교였다가 졸지에 주민 모두 천주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천주교의 위세가 개신교를 압도하였고, 관아에서도 어쩌지 못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격한 선교경쟁은 많은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4. 개신교와 천주교의 문서 논쟁
1904년 들어 해서교안이 일단락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이 해결되는 듯했으나 실제로 해서교안의 문제는 개신교와 천주교 측의 협상과 협력에 의해 해결을 찾기보다는 중앙정부와 천주교 측 및 불란서 공관 사이의 협상에 의해 해결되었기 때문에 사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신교 선교사들과 천주교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고, 양측이 문서를 통해 논쟁을 벌이는 단계로 발전했다.
선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상대방의 교리를 비난하는 문서와 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는 한편 자신들의 교육용 교재 등으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갈등 관계를 유발시켰던 것이다. 이 문서논쟁은 개신교 측에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1908년 개신교 측은 최병헌(1858-1927)이 저술한‘예수텬쥬량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을 정동교회에서 순 한글로 발행했다. 최병헌은 1888년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위원(1890-1900년)과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의 주필과 기자로 활동했으며, 1900년에는 신학월보를 창간하여 발행했으며, 성산유람기, 서교고략(西敎考略) 등을 집필하는 등
대표적인 신교 문필가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최병헌의 비판의 초점은 천주교의 왜곡된 성경해석과 잘못된 교리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교황제도를 비판하면서 최병헌은“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었다 함은 이 권세를 홀로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며 여러 사도와 후세 제자들이 다 이 권세가 있으므로” “해석함이 성경에 합할”것이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최병헌은 “스스로 전지전능하다 하며 자기의 말씀하는 것은 곧 텬쥬(천주)의 명령과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천주교의 교황무오설을 비판했다. 천주교의 교황무오설이야말로 인간이 원죄를 이어 받은 죄인이라는 성경의 기본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천주교에서 생명처럼 여기는 미사예식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운명하실 때에 일이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 신부들이 자기 임의대로 제사를 드림은 예수께서 속죄하신 제사를 완전치 못하게 여김이요 주의 말씀을 믿지 아니함”이라며 속죄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무시한 처사라는 것이다. 또한 고해성사가 부부관계와 왕과 백성과의 관계를 이간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사람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면 그 후는 신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큰 문제는 죄인이 어떻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부 또한 사람이라. 사람마다 다 죄가 있어 능히 스스로 자기 죄를 사할 수 없거늘 어찌 능히 남의 죄를 사하리요.…목사와 감독이 조금도 속죄하는 권이 없다 하며 스스로 속죄할 수도 없고…지옥에 간 영혼을 다시 천당에 들어가게 할 수도 없다 하니라.”고 하였다.
또한 성경에“사람마다 다 죄가 있다 하였으니 마리아도 또한 사람이라. 예수께서 하나님과 세상사람 사이에 중보가 되셨으니 마리아가 어찌 세상 사람의 중보자가 될 수”있겠느냐며 마리아의 무죄설과 중보설을 비판했다. 마리아 중보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케 된 것을 무로 만든다는 것이다. 신부들의 금혼 역시 모든 감독들이 결혼하였고, 심지어 베드로 역시 장모가 있다는 것이 결혼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며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처럼 천주교의 교황무오설, 교황제도, 화체설 및 고해성사, 마리아 중보설에 대한 교리적인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그 외에도 라틴어 사용, 연옥설, 면죄부 판매 등 천주교의 잘못된 전통과 교리들을 반박했다.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금지하고 성경과 성경해석을 신부들의 전유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최병헌의 비판은 당시로서는 천주교에 대한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에 반해 천주교 측의 개신교 비판은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상기시키고, 오히려 다음 네 가지 기준, 첫째, 지극히 하나 되어야 하고, 둘째, 지극히 거룩하여야 하고, 셋째, 지극히 공평하여야 하고, 넷째, 종도를 따라 전해지는 전통이 있어야 하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천주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이다. 개신교에 대한 천주교의 비판서로는 연대와 저자가 언급되지 않은 1908년경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양교명증문답’(兩敎明
證問答), 1907년에 서울의 종현천주당(鍾峴天主堂)에서 민덕효(閔德孝, Mutel)가 감수하여 펴낸‘진교사패’(眞敎四牌), 그리고 1923년 천주당성서활판소에서 안세화가 저술한‘일명 루테로(루터) 실기’로 알려진‘신교의 기원’(新敎之起源)을 들 수 있다.
‘진교사패’는 중국에서 동중화(董中和)에 의해 저술된‘예수 진교사패’를 한기근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번역한 것을 뮈텔 주교가 감수하여 출판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구에서 있었던 이 논쟁이 이 시기 한국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천주교 측은 루터를 가리켜‘마귀의 종 된 음란한 자’,‘ 방탕한 놈’, 심지어‘미친 놈’,‘ 길가의 소똥버러지 같은 위인’이라고 혹평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가 천주와 맺은 서원을 깨고 수녀와 결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종교개혁은 결국 사욕을 채우기 위한 자기변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저들의 비판의 요지는 개신교는 타락한 인성에는 입교하기 쉽고 준행하기도 쉽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종교는 오직‘천주성교회’하나뿐이며, 그래서 천주교만‘진교’(眞敎)이고, 개신교는 열교(裂敎)라고 통칭했다.
이 같은 비난에 대해 개신교 측은 루터는“국권을 농락한 교황 마귀 세력의 암흑세계를 혁파한 혁명가이자 광명자로서 그는 동양 제1의 성현인 공자와 같은 위인”(루터개교개략 서문)이라 하여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 어긋난 교황권을 신성시함으로써 천주교는“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비난하는 등 신·구교간의 문서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천주교 선교사들 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온 정치집단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개신교와 천주교와의 갈등,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개신교 선교사들이 천주교 선교사들을 교만하고 방자한 자들로 평가했던 것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83년 7월 30일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는 천주교 신부가 이수정을 찾아왔다가 간 사건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천주교 측의 발 빠른 움직임을 경계해야 할 것으로 거론하였고, 1877년 존 로스는 중국에서 복음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로 동서양 간의 문화적 차이를 지적한 다음 두 번째 요소로 천주교 신부들을 꼽았다.“ …저들의 자만, 방자함, 안하무인적 행동은 가장 타락한 교황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얻고 싶어하면서도 가장 학식 있는 자에게도 주지 않는 지위와 명예를 신부들은 요구한다. 로마 가톨릭 신부나 그들이 개종시킨 자들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중국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곳이 되었는데 이는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그들이 스스로 주님이라 부르며 전하는 그분(그리스도)을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지만 않았던들 벌써 3세기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는 소수집단으로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존 로스의 시각이 해서교안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이나 그 이전의 신·구교 선교사들의 대립 과정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 마포삼열, 헌트 등 일련의 개신교 지도급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 천주교 선교사들의 모습과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1900년대 한국에서의 신·구교 관계는 갈등과 대립, 충돌과 반목의 부정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양측 관계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한국기독교사연구회는“한국이라는 동일한 선교의 장을 놓고 선교 경쟁을 벌인 데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밖에도 상호간의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점과 지나친 선교경
쟁 그리고 외국선교사들에게 의탁하려는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대응방법에 대한 차이점 등이 이 같은 신·구교간의 갈등과 충돌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윤경노 교수는 그 원인을“양측 간의 대화의 결여”, “지나친 선교경쟁”,“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양측 선교사들의 신앙유형”, 그리고“양측의 재정적, 인적 지원”에서 찾았다. 또한 천주교 측에서는 이와 같은 사태의 원인을“척왜(斥倭)와 척양(斥洋)”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 해서교안의 문제를 직접 조사한 이응익은 각국과 맺은 조약문의 잘못과 백성들의 우매함과 더불어“양대인 세력을 이용한 교폐(敎弊)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박용규 교수는“외국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세력을 이용한 일부 신자들의 폐단, 양대인의 횡포, 여기에 편승하여 개인의 이권을 챙기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천주교 입문, 신입 교우들의 무리한 개종운동, 사통(私通) 등을 발행해 성당건축을 강요하며 이권을 챙기는 양대인 세력들 그리고 그들을 선도하기보다 그와 같은 행동을 부추기는 잘못된 천주교 신부들의 행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상의 견해들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으나 근본적인 진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신교와 구교의 종교 및 정치관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교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한다는 논리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생겨서 관아의 간섭을 받게 될 때 저들은 지방의 공권력을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교사의 집 마당에 형틀까지 갖추어 놓고 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의뢰하는 법적 소송 문제를 처결하고 형을 가하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의 처결을 받지 않겠다고 강경히 반항하는 일까지 벌여 한국 정부의 주권을 무시하는 치외법권적 태도를 취하므로 선교사와 지방관리들 사이에 종종 사법적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더 나아가 저들은 세속적인 이권이 개입된 청탁을
받는 일까지 종종 있어서 저들에게 빌붙어서 이익을 챙겨보려는 많은 불량배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저들의 세력을 믿고 지방 관리를 괴롭게 하는 복잡한 일까지 벌이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신교는 가능한 정부의 금령을 준수하면서 허용된 범주 내에서 선교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해서 지나치게 소심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선교를 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와 구교의 선교 초기의 갈등과 대립, 충돌과 반목의 요인은 양 교의 본질적인 종교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실례가 안되다면 말씀을 좀 더 들어볼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