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신년사 없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 결과만을 공개했다. 12월 28일부터 시작한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는 2019년 마지막 날이자 북한이 북미대화 시한으로 정한 12월 31일에 폐막했다. 기존 신년사와 비교해 구성이나 내용 모두 유사하다는 점에서 올해 신년사는 전원회의 결과로 갈음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직면한 장애와 난관들을 분석평가하고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결정적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이번 전원회의를 소집했다고 밝혔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개최한 전원회의를 통해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위한 큰 그림과 함께 신년사와 연계해 2020년 달성해야 할 세밀한 작은 그림까지 제시하였다. 이번 전원회의에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들 뿐만 아니라 당중앙위원회와 국가기관 실무담당자, 도인민위원장, 도농촌경리위원장, 시군당위원장을 비롯해 군기관 등 중요부문 일군들까지 방청객으로 참가토록 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단순히 신년사 방송을 통한 방향제시가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이행할 과업을 결정·지시함으로써 반드시 달성해야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2020년이 여러 측면에서 엄중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원회의의 핵심어는 ‘장기전을 대비한 정면돌파’이다. 이는 새로운 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미국을 통한 길에만 한 눈 팔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지난 하노이 북미협상 결렬은 북한으로 하여금 2018년부터 이어온 북미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잘못된 길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4월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이후 연말까지 북미대화의 시한을 정해두면서도 지난 8개월간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이 경제·군사 등 각 분야에서 보여준 행보는 2018년과 비교해 거침이 없었다. 북한의 새로운 길 ‘정면돌파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4월 정책노선 변경 이후를 되돌아보면, 가장 먼저 첨단전략무기를 손에 쥐게 한 국방과학기술의 비약을 앞세우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군사분야의 성과를 전면에 내세워 인민들의 안보적 우려 해소와 군권장악을 확고히 하는 차원이면서도 대외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대외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면서 정면돌파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미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이는 북한 인민들 입장에서 엄혹한 2020년을 보내야하고 또 경제개발 5개년전략 성과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원인을 미국에게 돌리고 ‘정면돌파전’ 선택의 명분과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북미대화에서 미국이 시간벌기를 하며 압살하기 위한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현 상황을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규정하고 있다. 핵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미국의 위협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국가의 안전과 존엄 그리고 미래의 안전을 그 무엇과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북한이 비핵화 협상테이블에 쉽게 나앉는 일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미국과의 장기적 대립과 제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쉽게 끝날 일이 아님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내적으로 인적 물적 토대를 극대화하는 등 내부역량을 총동원하는 장기전으로 나가겠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장기전이 될 ‘정면돌파전’을 위해서는 각 방면에서 내부적인 힘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역시 기본전선은 경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경제사업체계와 질서 정돈과 내각의 통일적 지도와 지휘 보장 등 경제토대의 재정비를 지적하고 있어 북한 경제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 이어 국가적인 위기관리체계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기존 신년사에 포함된 국가사업 전반에 대해 이번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실무자들에게 과업을 지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북한은 ‘정면돌파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정치외교적, 군사적으로 자주권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공세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 ‘새로운 길’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조성된 형세에 대처하여 외교전선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략’들을 제기하였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국제 연대나 다자협상 틀을 통해 외교전선을 강화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번 전원회의 결과에 신년사와 비교해 북미관계에 대한 평가를 제외하고는 남북관계를 포함해 대외관계에 대한 향후 방향 및 과업 제시가 없는 것은 그만큼 북한이 2020년엔 경제발전 등 내부 문제 해결에 노력을 집중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누구든 북한을 상대로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국방건설목표라고 언급하면서 전략무기개발을 지속할 것임을 밝혔다. 앞서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깨끗이 다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행동에로 넘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머지않아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언급한 새로운 전략무기는 지난 12월 동창리 엔진시험장에서 실시한 엔진 시험과 연관된 무기일 가능성이 높다. 고체엔진 ICBM, 다탄두 ICBM, 전략미사일 탑재 신형잠수함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전략무기의 등장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지난 2018년 4월 20일 3차전원회의 에서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중단하겠다고 한 모라토리엄 선언 중 ICBM 시험발사를 파기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북한이 “핵 억제력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립장에 따라 상향조정될 것”이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여전히 다소간 북미간 협상의 여지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열어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보기 어렵다. 앞서 북한은 “대조선적대시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고, 미국의 대조선적대시 정책이 철회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전략무기개발을 중단 없이 계속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발언은 말 그대로 미국이 제재나 적대시정책을 유지하거나 더 강화하면 핵무력의 질량적 강화의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북한이 핵보유국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북미협상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정면돌파전’으로 간다고해서 영원히 미국과의 관계를 종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북한에게 가장 매력적인 돌파구는 미국을 통한 해법일 수밖에 없다. 2020년 북한이 이번 전원회의를 통해 제시한 경제발전 등 내부적인 과제를 해소하고 노동당창건 75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2021년 봄 제8차 당대회를 개최한다면, 미국 대선이 끝나고 전반기 새 정부 진용이 갖추어진 이후 본격적인 북미협상의 2라운드 시작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변과 동창리가 살아 있는 한 2021년의 몸값은 지금과 다를 것이란 점이다.
중요한 것은 2020년 북미 관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동일한 방향으로 연동되어 움직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난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대화를 언급했고 2019년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조건 없는 재개를 언급했던 북한이었다. 이번 전원회의 결과에는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원회의 결과에 “미국과 그에 추종하는 적대세력들에게 계속 심대한 타격을 가할 것”이란 표현이 우리를 겨냥한 메시지처럼 들려 씁쓸하다. 2020년 북미대화 재개를 위해 현실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북미대화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남북관계, 우리 스스로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갈 용기와 구체적인 실천력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북미관계에 연동되어 있고 자율적이지 못한 남북관계가 아닌 새로운 남북관계 새판 짜기가 필요할 때이다.
우리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그 어느 해보다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외교전선의 다변화를 통한 남북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미국에만 의존해서 문제를 풀 것이 아니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접근, 해결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