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에겐 9.19가 둘이다. 2005년 9.19와 2018년 9.19다. 대개 전자는 ‘공동성명’으로 불리고 후자는 ‘공동선언’이라 불린다. 성명이든 선언이든 두 개 이상 집단이 합의한 방침을 공개 발표한 것이니 별 차이 없다. 국가 간 합의와 약속이 바로 깨지고 이행되지 않은 것도 비슷하다. 환호와 기대가 아쉬움과 실망으로 바뀐 것도 같다.
1. 2005년 9.19공동성명
2005년 9월 19일, 이른바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2003년 시작된 6자회담의 지루한 협상 끝에 드디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9.19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을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그와 관련된 계획을 포기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하지 않는다. 셋째,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넷째,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며 경수로를 지어줄 수 있다. 다섯째, 6개국은 한반도 평화 및 동북아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
이 9.19공동성명은 단 한 가지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고 물거품이 됐다. 미국이 바로 다음날 마카오의 한 은행을 ‘북한 관련 돈세탁 우려대상’으로 지정해 북한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11월부터 북한 인권상황을 거칠게 비난하며 UN 세계식량계획의 인도적 대북지원조차 모두 끊었다. 2016년 3월엔 북한을 포함한 몇 개국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게 미국의 안보전략 목표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미합동군사훈련 (RSOI)을 강행했다. 부쉬 정부가 북한을 고립시키고 경제제재를 강화하면 북한체제나 적어도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줄기차게 강경정책을 편 것이다. 이에 대한 북한의 응수는 굴복이 아니라 2006년 10월 제2차 핵시험이었다.
2. 2018년 9.19공동선언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을 상대로 직접 연설했다.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 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그림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몹시 인상적이고 참 감동적이었다.
1) 9.19선언의 의의
2018년 9월 남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 최고지도자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남북 역사상 세 번째였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회담과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회담에 이은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 문 대통령과 김 국무위원장의 만남 역시 세 번째였다. 2018년 4월과 5월 판문점에서의 만남에 이은 평양에서의 만남. 그만큼 2018년 9.19선언은 2000년부터 시작된 모든 남북정상회담의 총결산이었다.
나는 당시 9.19선언을 접하며 ‘한반도 대전환 시대’가 열렸다며 열광했다. 여기저기 글쓰거나 강연하면서 가장 많이 썼던 말이 “한반도에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1945년부터 지속된 한반도 분단 상태를 끝내고 통일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 무려 73년 만에. 남한 정부의 통일정책 제1단계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공존’이 이미 시작되었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안에 ‘실질적’ 통일까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둘째,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무려 68년 만에. 1953년까지 3년간 싸우고 65년 동안 어정쩡하게 멈추거나 (停戰) 쉬고 있는 (休戰) 비정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종전 (終戰) 선언과 평화협정을 불러올 수 있게 되리라 기대했다.
2) 9.19선언의 내용
실질적 통일과 종전 및 평화를 즉각 불러오리라 기대했던 9.19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지역에서 군사적 적대관계를 끝내기로 했다. 나아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적대관계를 해소하기로 했다. ‘실질적 종전’을 합의한 것이다.
둘째, 상호호혜와 공리공영을 바탕으로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키기로 했다.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남북 사이에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정상화하며, 서해 경제공동특구와 동해 관광공동특구를 추진하기로 했다.
셋째,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도적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금강산 지역의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곧 열고, 이산가족의 화상상봉과 영상편지 교환을 추진하기로 했다.
넷째, 화해와 단합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추진하기로 했다. 문화 및 예술 분야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1919년 3.1운동의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했다. 2020년 하계올림픽 경기대회에 공동으로 진출하며, 2032년 하계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유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다섯째,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도 추진하기로 했다.
여섯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 2000년 6월, 2007년 10월,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이어 처음으로 서울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3) 9.19선언의 경과와 결과
그러나 2018년 9.19공동선언 역시 2005년 9.19공동성명처럼 단 한 가지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북관계는 후퇴하며 얼어붙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첫째 합의사항인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과 둘째 ‘철도와 도로 연결 및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게 몹시 안타깝다. 크게 네 가지만 꼽는다.
첫째, 남북이 군사적 적대관계를 끝내기로 했지만, 남한은 국방비를 크게 늘리며 미국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미국의 최첨단 전투기 수십 대를 도입했다. 북한은 2019년 한 달에 한 번꼴로 미사일이나 대포를 쏘아 올렸다.
둘째, 남북 사이에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정상화하며, 서해 경제공동특구와 동해 관광공동특구를 추진하는 등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키기로 했지만,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금강산관광 재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적으로 절실하게 원했던 사항이다.
셋째, 금강산 지역의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곧 열고 이산가족의 화상상봉과 영상편지 교환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준비모임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남한에서는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까지 거창하게 꾸렸지만, 조촐한 공동기념식조차 갖지 못했다.
넷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지만, 북한은 남한을 향해 조롱과 비난만 퍼부었다. 2020년 6월엔 개성공단에 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다. “머지않아 쓸모없는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낸 터였다. 2018년 4월 문재인-김정은의 판문점선언에 따라 9월 문을 연 곳이다. 남북 간의 모든 통신연락선도 끊었다.
4) 9.19선언의 파탄 배경
2019년 2월 베트남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미관계가 정체되고 남북관계는 후퇴되었다. 여기서 남북관계 후퇴는 남한 탓이 크다. 남한은 북한이 2019년 미사일을 비롯한 새로운 무기 시험발사를 10번 이상 하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킨다고 비난하지만, 먼저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쪽은 남한이다. 남한은 1990년대부터 적어도 20년 이상 최소한 10배 이상 북한보다 군사비를 더 많이 써왔으면서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 훨씬 더 크게 늘리고 있다. 특히 미국의 첨단무기를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들이고 있다. 해마다 미국과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벌여온 가운데 2020년까지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다. 남북 사이에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겠다고 했지만 미국의 허락을 받지 못해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미국의 눈치만 볼 뿐이다. 미국의 동의나 허가를 받지 못해 북한과 약속한 사항을 전혀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적대시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가 군사비를 크게 늘리며 미국의 첨단 전투기를 많이 도입하는 것은 남한이 1970년대부터 추구해온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돌려받아야 하고, 나아가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에 대한 대비도 해야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남한의 군비증강을 북한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북한의 군사비는 기껏해야 남한의 1/10 수준이고 많아야 미국의 1/100도 되지 않는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첨단무기를 들여오지도 못한다. 러시아나 중국과 단 한 번도 합동군사훈련을 벌이지 않는다. 남한의 군비증강과 한미군사훈련에 맞서 할 수 있는 대응이 핵무기와 미사일 시험 ‘도발’ 밖에 없지 않은가. 미국의 ‘승인’ 없이는 철도와 도로 연결은커녕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조차 하지 못하는 남한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이 조롱과 비난 그리고 분노와 공격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5) 9.19선언을 살리기 위한 남한의 길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와 맞물려 진전되는 구조다. 남한은 북한과 미국의 70여년 적대관계 사이에 끼어있기도 하다. 북미관계가 진전되면 남한은 뒤따라가면 되지만, 정체되면 앞장서 이끌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북한과 평화공존 및 통일을 추구하며 화해협력을 진전시키려면 미국으로부터 동맹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기 마련이고, 미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한미공조를 중시하면 북한으로부터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이제 한미동맹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한미동맹은 냉전시대에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극우 세력은 탈냉전시대에도 여전히 한맹동맹 강화를 국가 ‘목표’처럼 간주한다. 한미동맹이 약화하거나 흔들릴까봐 북한과 전쟁을 끝내면 안 된다는 한 국회의원의 반민족적이고 반평화적인 망언까지 나왔다.
한미동맹이 북한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언제까지 필요할까? 2018년 9.19공동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남과 북은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로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한 터에 북한을 겨냥한 한미동맹이 왜 언제까지 필요하겠는가.
한미동맹이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필요하고 바람직할까? 중국은 급속하게 떠오르는 강대국으로 남한의 제1 무역상대국이다. 한국-중국 무역량은 2004년부터 한국-미국 무역량보다 많아졌고, 2009년부터는 두 배 넘었다. 2020년 <한국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최근 3년 (2017-19년) 한중 교역량은 연평균 1,468억 달러인데 한미 교역량은 715억 달러다. 중국에서 얻은 무역흑자는 연평균 430억 달러인데 미국으로부터의 흑자는 144억 달러다. 중국과의 무역규모는 미국보다 두 배 이상이고, 흑자폭은 3배 안팎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을 겨냥해 한국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겠는가.
게다가 미국과 중국은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는 군사정책을 전개하고 중국은 미국의 접근을 거부하는 군사정책으로 맞서며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만에 하나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의 제1폭격 지역과 대상은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이 되지 않을까. 주한미군 때문에 한국이 전쟁터로 변할 위험성이 큰 것이다.
한미동맹 강화는 남한의 9.19공동선언 이행을 어렵게 하며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에 지장을 초래하며 만에 하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질 때 남한에 불꽃이 튀게 할 가능성이 크다. 9.19공동선언을 살리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