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초
만상이 몸을 사려 차마 오지 못한 길을
푸른 잎 돋기 전에 향기로 다가와서
뭇가슴 토닥거리며 건네주는 속삭임
이 모진 추위도 언젠간 지난다고
생명의 신비는 고통 속에 있노라고
노랗게 피워 올린 건 미리 쓰는 봄 편지.
요양원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무거운 벨소리에
조심스레 내밀던 마음을 웅크리며
밀폐된 공간 속으로 스미듯 들어선다.
고요함 깨끗함
없는 듯 있는 이들
삶 속에 혼신의 힘
다 쏟아 부은 후에
정신이 아득해지면
이렇듯 살아갈까
때가 되면 밥 나오고
아프면 약도 주고
드문드문 오고가는
핏줄도 있잖아
인간의
존엄성이란
연명에 묶인 언어
누구도 장담 못할 자신의 미래 앞에
부끄런 손 내밀며 오래오래 사세요.
머금은 미소 속에는 눈물이 한 아름이다.
거듭나기
너무 많이 태우면
재가 되어 버리지만
적당히 타고나니
숯으로 거듭나네
아픔도
잘 다스리면
숯이 될 수 있을 거야.
숯이 된 마음들을
독 안에 띄워놓고
햇살과 바람 섞어
시간을 다독이면
농익은
장맛이 되어
거듭날 수 있을 거야.
추억
오래된 모든 것은
온기가 남아 있다.
해마다 머리 얹어
수백 년을 감싸 안은
초가집
그 앞에 서면
세월이 돌아든다.
내 가족 내 친구들
오래된 얼굴들이
지나간 시간에 묻혀
사라진 기억들이
수첩에
빼곡히 적혀
숨 고르는 이름처럼.
조응
-이우환 미술관에서-
커다란
돌 하나에
널따란
철판 하나
자연과 인간 사이
무언의 교감인가
숨죽인
응시 속으로
살아나는 예술혼.
안개
허물도 자랑도 모두가 묻힌 시간
속을 채울수록 가벼워진 풍선처럼
두둥실 날갯짓하며 차오르는 생각들
좀 더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어 주렴
온전히 혼자여야 맑을 수 있을 테니
알수록 상처로 남는 세상을 가려 주렴.
하얀 꽃
주인 없는 책상 위엔 빈 이름만 놓여있네
부르고 또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얼굴
그토록
생기 넘치던
목소리 어디 갔나
오늘도 팽목항에는 애타는 메아리만
무심한 물결 따라 파도 위를 오가는데
피지도
못한 꿈들은
어드메쯤 잠들었나.
살아가는 법
젊음의
꽃 같던 시간
저를 위해
바쳤는데
검버섯
피어나는
이 시간을
못 바치랴
가없이
날갯짓하는
바람마저
접어 두리.
따라하기
굳은 표정 대하면
나도 몰래 굳어져요.
웃는 얼굴 바라보면
내 얼굴도 피어나요.
저절로
굳었다 피는
내 얼굴도 누가 봐요.
❙시작노트
시는 삶 속에서 태동합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시를 건져 올리기란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음이 풍요롭지 않으면, 시는 저만치 달아나 버리니까요.
마음에 담고 있지 않는 모든 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한참을 떠나 있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니,
시는 역시 제 삶의 일부인가 봅니다.
언젠가 제 삶의 전부인 듯 여겨질 때,
마음에 쏙 드는 시 한 편, 안을 수 있을까요?
첫댓글 동인지에 실린 글 모음인가 보군요.
마지막 글은 동시풍이네요.
아이가 있는지라 아무래도 눈이 먼저 갑니다.
하얀 꽃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직자들의 잘못으로 비명에 간 아이들 생각하면서 함께 슬퍼해 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죄송스럽습니다.
한 편 한 편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작품은 동시조로 쓴 것이랍니다.
하얀 꽃,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거듭나기도 감칠 맛 나는 좋은 글이네요.
숯과 장맛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버무릴 수 있는 분 처음 보았습니다.
시조장르니까 더욱 옛스럽기도 하고요.
큰 일 났네요.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해야 할 일이 쌓였는데 이렇게 좋은 글들 하나씩 음미하면서 읽자면 밀린 일들은 언제 하지요?
고맙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댓글까지 주시고~.
읽어 주심만 해도 과분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