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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Odessa, la 23a de aŭgusto(mar.) 2016
키시나우를 러시아어로는 키시뇨프라고 부른다.
6시 정각에 로비에 모든 단원들이 다 내려와 있다. 호텔에 부탁한 차는 정확하게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많은 짐을 싣고도 4명씩 탈 수 있는 큰 차를 불러주었다. 차를 부를 때마다 요금을 흥정해서 쪽지에 써주기 때문에 편리하다. 전에 택시는 35레이였는데 오늘은 미니밴이라 50레이다. 4명이 짐 싣고 3,000원 정도니 우리에게는 부담되는 것이 아니다.
도착해서 보니 아직 우리가 탈 차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앞에 짐을 늘어놓았다. 표를 늦게 샀기 때문에 좌석이 11번부터 18번이라 뒤에 있다. 그러나 차에는 좌석번호가 없어 사실상 그 번호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찍 줄을 서는 사람이 먼저 좋은 자리를 잡는 사실을 그동안 버스여행에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서 짐을 싣는 시간에 짐 없는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기 때문에 그곳에 작은 가방들을 미리서 놓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지쳐있는 단원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국내전쟁 때문에 티라스폴을 지나 우크라이나를 거쳐 가면 여권에 스탬프가 없어 그곳 검사원들이 돈을 요구한다고 하는데 알고 있는가?”
혼자서 2주간 여행한다는 동경에서 온 일본어선생이 약간 걱정된 모습으로 묻는다.
“하루 이틀 아니고 매일 여러 편이 운행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아마 해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때는 좀 주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년이 가까워 보이는 그 선생은 안심이 되는지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 여러 명 함께 가게 되어 기쁘다”고 이야기했다.
6시 55분 한 자리도 남지 않고 20명 꽉 찬 버스가 출발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 버스는 Tiraspol 쪽으로 가지 않고 그보다 서쪽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다 8시 10분 Causeni를 지난다.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92년에는 드네스트르(Dnestr)강 동안(東岸)에 드네스트르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슬라브족들과의 무력 분쟁이 일어났다. 드네스트르공화국은 실제로 몰다비아와 완전히 분리하여 운영되고 있지만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에는 드네스트르 공화국의 수도인 티라스폴을 통해서 오데사로 가는 기차와 M14번 도로를 통한 버스가 아무 문제없이 쉽게 다닐 수 있었는데 최근 크림반도를 비롯한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이곳 루트에 대한 많지 않은 정보를 찾느라 애를 썼는데 분명하지 않았고, 일본 사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텔에서 산 몰다비아 지도에는 드네스트르 공화국이 같은 나라로 되어 있고 국경표시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국경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지금길인 티라스폴을 거치지 않고 남쪽으로 훨씬 내려와 카우세니를 거쳐서 국경으로 가는 R-30번 도로를 타고 내려와 9시 10분 국경에 다다랐다. 10분쯤 기사가 쉬면서 과일을 산다. 상점 앞 길가에서 파는 도마토 오이 복숭아 같은 과일이 좋고 싼 모양이다. 국경에는 오데사로 가는 많은 대형 화물차들이 줄을 서 있다. 농산물이 대부분일 것으로 보인다.
차가 국경 검문소에 서자 여권을 거두어 가더니 20분만인 9시 40분에 일을 마치고 통과하여 불과 3분 만에 우크라이나 국경검문소에 다다랐다. 몰다비아 검문소와는 다르게 군복을 입은 요원들이 많고 시간도 꽤 걸린다. 일본 선생이 뇌물을 받는다고 이야기했던 국경이다. 여권을 걷어간 뒤 꽤 시간이 걸린다. 기사가 윤지를 데리고 간다. 기사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데 윤지가 가끔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말이 통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윤지가 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그대로 두었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교수님을 모시러 왔다.
“어디 가는가?”
“오데사 들렸다가 키에프로 간다.”
“우크라이나와 접촉할 사람을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에스페란토 대표단이고 현지 협회에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전화해 보아라.”
교수님이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보여주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어느 나라에 들렸는가?”
“몰다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
드네스트르 공화국을 들렸다고 하면 문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우크라이나가 인정하지 않는 나라이고, 도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것은 트집을 잡을 수가 없다. 다른 차들은 다 갔는데 우리 차는 좀 늦어 10시 30분에야 통과. 50분이 다 걸린 것이다.
세관은 바로 통과, 이어서 화장실에 섰다. 우선 상점에 들어가 전화를 걸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전화가 없다고 한다. 기사도 전화를 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결국 마중 나온 사람에게 도착지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해남도 화장실보다 더하다.”
차라리 바깥의 밭이 더 낫다. 국경통과시간이 오래 걸려서인지 기사는 좋지 않은 도로를 사정없이 달린다. 그리고 12시가 조금 못되어 목적지인 오데사 Centrala 버스터미널에 다다랐다. 마중나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선 돈을 바꾸고(Gribna) 화장실을 다녀고 손님을 끄는 택시와 흥정을 하였다. 차 1대에 200 그리브나라고 한다. 1 그리브나가 48원쯤 되니 넉넉히 50원이라고 생각하면 10,000원이다. 손님 끄는 사람과 흥정하면 바가지 쓴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한 명당 2,500원,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길을 버스나 전차 물어서 짐 끌고 다니는 것보다는 다른데 덜 쓰고 바가지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그대로 받아들이고 편하게 호텔로 왔다.
3시에 다치아나와 친구 에스페란티스토과 호텔로 왔다. 금박사와 교수님 부부는 박물관을 보기로 하고, 나머지는 바로 흑해의 피서지인 아르카디아(Arkadia)로 가서 해수욕으로 하기로 했다. 해수욕장은 다치아나가 안내하고 박물관은 타야 씨가 맡기로 했다.
Stronghouse라는 곳에 가서 그 사이로 내려가니 바로 모래사장이 나왔다. 비치에서 드러눕는 의자와 비치파라솔, 그리고 수건을 돈 주고 빌렸다. 의자와 비치파라솔만은 100 그리브나(5,000원), 수건 30 그리브나(1,500원)로 비싸지 않았다. 작년에 일어난 러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화폐가치가 반으로 떨어져 상대적으로 우리는 절반 가격으로 여행을 즐기지만 마음이 아팠다. 코토르에서 아드리아해에 이어서 흑해에서 수영도 하고 진호엄마의 권유로 카약을 타 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저녁밥은 나무로 배처럼 지은 멋진 식당 3층에서 흑해를 바라보며 먹었다.
“달이 뜬 날 하늘은 파랗지만 바다는 정말 까만색이라 진짜 흑해를 볼 수 있다.”
밥 먹을 때 다치아나 선생이 이야기했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구름이 끼어 멋진 흑해를 볼 수는 없었다. 오데사에는 세 가지 유명한 것이 있다고 한다. 첫째, 포템킨 계단 Potemkinski Skhody, 둘째, 국립 발렛ㆍ오페라 극장, 셋째, 아르카디아 비치클럽이다.
전차를 타고 돌아오니 22시가 다 되었다.
10시 다치야나와 타야 여사가가 와서 전차를 타고 중심가로 들어갔다. 타야 여사는 하얀 바탕에 예쁜 수를 놓은 전통 옷을 입고 왔다. 오늘이 바로 독립기념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전통 옷을 입고 중심가로 가서 독립기념일을 자축한다고 한다. Lubov Veikaja 여사와 아들 Vladislav Velikij가 합류하여 모두 12명이 함께 시내관광에 나셨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푸시긴 거리에 있는 푸시긴 동상이다. 높지 않고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세워진 동상은 지팡이로 뒷짐을 진 날씬한 신사 모습이다.
푸시긴 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보행자 거리인 데리바십스카 거리(Deribasivska Vulicya)가 나온다. 이 거리 3번지에 Ribas라는 아파트가 있고, 네모난 아파트 한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화단에 자멘호프의 동상이 있다. 50년대 초에 만들어진 이 동상은 이곳에 살던 N. V. Blazhkov라는 조각가가 자기 집 정원에 만든 것으로, 블라즈콮은 오데사에서 에스페란토 운동을 이끌던 유명한 에스페란티스토였다. 이 설명을 하는 다찌아나 여사는 바로 그 선생의 제자였다고 한다. 뜻밖에 에스페란토를 만든 자멘호프 동상을 만나 감격에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시에서 중요 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블라즈콮은 생전에 두 개의 자멘호프 동상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리아 피사니짜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자멘호프 동상을 나와 한 거리를 더 올라가 Lanzheropovskaya 거리에 국립극장이 나오고 그 앞에 임시 설치한 무대에서는 독립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국립극장 앞 분수와 건너편 고고학박물관 앞 조각에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프리모르스카야 거리가 나오고 시청 건물과 광장이 나온다. 하얀 시청 건물에는 이 지역 경제를 상징하는 농민과 상인이 조각되어 있다. 시청 앞에는 큰 국기를 수십 명이 들고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며 독립을 자축하고 있으며, 시청 앞에서 유명한 포템킨 계단까지 이어지는 프리모르스카야 거리에는 양쪽에 갖가지 물건을 파는 하루 장터가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전통 문양이 든 의상들이고 많은 악세사리들도 팔고 있었다. 14시에 공항 가는 차를 불러놓았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호텔에 돌아가야 하는데 시간은 이미 12시가 되었다. 단원들은 관광지도 좋지만 시장에서 자그마한 선물들을 사기 바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교수님은 저고리에 다는 많은 무늬 가운데 卍자 무늬가 있어 사진을 찍고 목거리 끝에 달린 펜단트를 卍자로 만든 것이 있어 하나 사셨다(5,000원). 파는 사람은 그 卍자가 자기들의 전통문양이라고 했다.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광장에는 Duke de Richeliu 동상이 축제일을 맞이하여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다. 이 동상은 1828년 이 도시에서 가장 처음 세워졌고,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동상이기도 하다. 듀크는 로마의 겉옷인 토가(Toga)를 입고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며, 그 아래는 세 명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농업, 상업, 정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리슐리(Armand Emmanuel de Richelieu)는 1804~1805년 오데사를 통치한 프랑스 귀족으로 오데사를 자그마한 시에서 주요 무역항으로 개발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오데사 시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이어서 포템킨 계단으로 가자 계단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멀리 시원한 바다와 항구가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포템킨 계단은 1837~184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프리모르스카야 거리에서 오데사 항구로 내려가는 주요 계단이다. 142m, 192계단은 1925년에 만든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꼭대기 너비는 12.5m이고 맨 아래는 27.1m인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위아래 너비가 똑 같은 것처럼 보인다. 계단에 들어가려니 오른쪽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오늘 이곳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을 따로 입장시켜 그 수를 세는데, 모든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에게 목에 이름표를 걸어준다. 우리는 전통의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오른쪽에 있은 통로를 이용하여 들어갔다. 본디 유명하고 아름다운 계단인데다 전통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광경은 볼만하였다. 각 방송국에서는 인터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작년에는 840명이 모였는데 금년에는 12시 현재 이미 2,200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수시로 상황을 방송하기 때문에 그 방송을 듣고 타야 선생이 알려준 정보다. 이 행사는 어느 기업체에서 후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해방기념일에 이처럼 전통의상을 입고 모이는 행사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에서 계단을 올라와 리슐리 동상이 있는 광장을 지나 곧추 가면 다음 광장에 오데사를 설립한 사람들의 동상이 나온다. 1900년에 세운 이 동상에는 총사령관이었던 Grigory Potemkin 왕자, Novorossiya의 지배자였던 Count Platon Zubov, Hadjibeyan 공격의 우두머리였던 Joseph de Ribas, 미래 오데사의 마스터플렌을 짠 Francois de Wollant, 러시아 여왕 Catherine 2세 같은 사람들이 서있다. 1920년 이 동상은 제거되었다가 90년이 지난 2007년에 다시 세웠다.
우리는 Gogoly라는 작은 거리를 지나갔다. 다치아나가 갑자기 어는 한 곳에 서서 모두 그곳으로 모이라고 하더니 한 건물을 가리켰다. 벽만 서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사실은 벽만 서있는 건물이 아니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외벽 건물(House of One Wall)’이다. 조금 비켜서서 보면 삼각형의 집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1887년 Kimov라는 건축가와 Zbigniev라는 기술자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조금 지나가니 다시 바닷가가 나오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그리스식 콜로네이드(柱廊 Colonnade)가 서 있다. 1826~1828년에 세운이 콜로네이드는 모두 20개의 하연 기둥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여기서 항구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남자상기둥이 받치고 있는 유명한 건물을 지나 조금 가서 우리는 길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간은 바쁜데 30분 지나도 시킨 음식들이 늦게 나와 몇 사람은 거기서 먹지 못하고 싸가지고 와야 했다. 부지런히 전차를 타고 호텔에 와서 미리 부탁한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여행이지만 비행기는 처음 타본다.
오데사에서 키에프 가는 길
오후 : 오데사(ODS 16:55)-PS058✈-키에프(KBP 17:55)
국내선이지만 비행기는 우크라이나 국제항공이다. 마침 기내잡지에 스리랑카 특집이 나왔는데 힌두교 코끼리 신 머리에 卍자가 있어 교수님은 그 책을 한 권 자료로 가지고 오셨다.
공항에서 내리니 국내선이라 모두 나가고 짐을 찾는 사람은 우리 외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를 맞이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짐을 찾느라 나가지 못해 마음이 불안했다. 얼마 뒤 밖으로 나가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중 나온 사람이 우리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이 다 나왔는데 우리가 나오지 않자 3층까지 올라가 찾아다녔고, 그 사이 우리는 짐을 찾아가 가지고 나와서 서로 엇갈렸던 것이다. 어려움은 없었다. 나오자마자 자가용 영업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끌고 있어서 흥정하여 550 그리브나(약 3만 5천원)에 8인승 승합차를 빌려 아주 편안하게 호텔까지 왔다. 그리고 나중에 공항 갈 때는 450 그리브나에 가기로 했다.
호텔방은 높은 곳이라 시내가 시원하게 보여 좋았다. 가까이 슈퍼가 있어 장을 봐가지고 왔더니 공항에 나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한 분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의사인 알렉산드르 씨는 마침 쉬는 날이라 공항을 나갔는데 내일부터는 일을 하여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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