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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Kievo, la 25a de aŭgusto (jaŭ.) 2016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 우크라이나 키에프를 보는 날이다. 우크라이나는 열정적이고 젊은 나라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당선된 여당 후보의 부정 선거 증거가 드러났다. 분노한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행동했다.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키예프 시내를 오렌지 물결로 가득 채운 우크라이나의 시위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에는 헌법까지 개정시키며 대통령 재선거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냈다.
키에프는 5세기에 형성된 도시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도시다. 3개의 국가는 9-11세기 슬라브의 강대한 국가인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에서 유래됐다. 그 후 키에프는 몽고의 침략, 사회주의자의 도시화 정책, 세계 2차 대전간의 대규모 파괴로부터 살아남았다. 모스크바가 가까운 이곳은 원전사고로 유명해진 체르노빌에서 불과 100km떨어진 곳이다,
아침 10시 Mikaelo Lineckij(38-063-849-3193) 씨가 약속한 대로 정확하게 호텔로 왔다. 이곳 협회 부회장인 미카엘 씨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외국 손님들을 안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 구경할 동선이 완전히 결정되어 있었다.
공항에 마중나왔던 알렉산드르 씨 s-ro Alecandr Griszeko
우리는 가까운 역전에 있는 메트로(Bokzalana)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대학역(Universitet)에 내렸다. 지하철 한 역이고 거리가 500~600m밖에 되지 않지만 쉡첸토 거리(Shevchenko Blvd)는 언덕을 올가야 하기 때문에 지하철을 탄 것이다. 키에프는 언덕의 도시라고 할 만큼 높은 언덕 위에 구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다. 또 한 가지 대학역은 꼭 한 번 봐야 할 만큼 아름다운 역이라는 것이 미카엘씨의 설명이었다.
역에 내린 우리는 먼저 돈을 바꿀 은행을 찾아야 했다. 몰다비아 돈을 바꾸지 못하고 가져온 것이 꽤 많아서 우크라이나 돈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만 보내고 바꾸는데 실패하였다.
첫 번째 찾아간 곳은 대학역에서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블라디미르 성당(Volodymyrska Church)이었다. 블라디미르 성당은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당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성당 가운데 하나이고 키에프의 주요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이다. 1852년 키에프 대공국(공식 이름은 루스 rus’)의 세례 900주년을 기념하여 대성당 건립안을 러시아제국 정부에 제출하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가 그 제안을 찬성하였다. 대성당 건립지는 ‘루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키에프로 정하고 성당 이름은 루스에 그리스도교의 광명을 가져다준 블라디미르 성인의 이름을 썼다. 대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전국에서 기부금을 모아 유명한 건축가와 화가들이 참여하여 1896년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다. 1920년 공산당 정권이 대성당을 폐쇄하고 나중에 무신론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정교회에 넘겨져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뒤 1992년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에프 총주교청에 넘겨져 총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성당 옆길인 레온토비차(Leontovicha)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케멜니츠코호(Khmelnitskoho)라는 큰 거리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가다 우리는 다시 은행을 찾았고, 다음 날 다시 큰 은행을 찾는 등 노력했으나 결국은 몰다비아 돈은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깨끗한 건물에서 쉬면서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이 로고의 사진을 찍고 났는데 사진 촬영이 안된다고 한다. 왜일까? 인터넷으로 광고가 되서 더 좋을텐데.....
부폐식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Volodymyrska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가는데 대한민국 태극기가 보였다. 두 달 만에 보는 한국 대사관이라는 한글이 반갑다. 기념사진을 찍고 얼마 가지 않아 11세기에 세운 황금대문(Golden Gate)이 나왔다. 바로 이 대문이 구시가로 들어가는 문이었는데, 지금은 그 문 위에 큰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문을 보려면 따로 입장료를 내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한 블록을 더 가면 거대한 성 소피아 성당이 나온다. 세계문화유산인 성 소피아 수도원은 키예프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11세기에 원형이 만들어졌으나 17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내부는 5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자이크와 야로슬라프 공의 아내와 딸의 일상생활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공의 대리석 관도 그대로 안치되어 있다. 여러 성상들도 내부 장식이 한몫을 하고 있다. 키에브에서 가장 오래되고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잘 보전돼 있다. 꼭대기에는 십자가 외에도 해, 달, 별들을 상징하는 심벌들이 십자가와 함께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파간(pagan)이 숭배하던 해 달 별 같은 심벌들을 받아들인 과도기적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pagan" 및 "heathen"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일신교 신자들이 스스로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모욕어로서 이용되어 왔다.
표를 사는 동안 상점에 들어갔던 진호가 파는 사진에서 卍자를 발견하여 교수님은 그 사진과 설명이 되어 있는 책을 한 권 샀다. 그러나 실제 사진은 찍지 못했다. 卍자 있는 벽이 예배 보는 단 뒤쪽에 있는 데다 성당 안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입구에 있는 설명서조차 사진을 못 찍게 한다.
성당 앞쪽은 소피아광장이고 이 광장에서 소피아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부리차야 크레쉬차틱(vulistya Khreschchatyk)이다. 크레쉬차틱의 남쪽 끝은 베사랍스키(Bessarabsky) 시장으로 과일과 야채 노점상이 가득하다. 구시가는 키에프 도심에서 걸어서 다녀 올만한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16시를 훨씬 넘었다. 17시부터 도서관에서 에스페란티스토들과 모임을 갖기로 했기 때문에 택시를 불러서 서둘러 갔다.
미니버스 타고 걸어오려고 했던 소피아 거리를 지나니 키에프의 수호신인 자유 여신상이 있는 독립광장이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유럽광장을 지나면 아래로 내려가는 Volodymyrskye descent가 있어 언덕을 내려가게 된다. 내려오는 도중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가 보이고 조금 더 가면 드니프로강이 시원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목적지로 하고 있는 국회도서관은 바로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17:00~19:00 에스페란티스토 모임을 가졌다. 모임을 가진 도서관은 매달 정규적으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갖는 국회도서관으로 관장이 에스페란토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모임 첫머리에 관장이 꽤 긴 인사말과 도서관 설명이 있었다. 우리가 8명, 키에프 회원이 7명이 참석하여 모두 15명이 서로 자기소개를 하였다. 미콜라는 에스페란토로 된 민요 CD와 가사를 주었으며, 아울러 3명이 함께 피아노를 치며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서로가 알고 싶은 것을 질문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두 시간의 친교시간을 가졌다.
돌아올 때도 8명이 탈 수 있는 차를 예약해서 편하게 돌아왔다.
9시 반 무랃(Murad) 씨가 호텔로 와서 함께 출발하였다. 트롤리버스로 대학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아르세날나(Arsenalna) 역에서 내려 다시 소형 버스로 오늘의 첫 목적지인 키에프 페체르스크 라우라(Kyiv-Pechersk Lavra)에 다다랐다. 입구에는 국립 역사문화재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성 소피아 카테드랄과 10개가 넘는 여러 수도원이 함께 등재되었다고 되어 있다. 차에서 내려 처음 들어가는 곳은 성 소피아 성당이다. 입장료는 20 그리브나인데 사진 찍는데 200 그리브나씩을 받아 교수님 혼자만 사진 찍기로 하였다. 사진기만 돈 받고, 핸드폰은 공짜라고 하니 모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렇게 사진 요금을 비싸게 받았지만 그 넓은 지역을 다 감시할 수 없어서인지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있어도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어제 만난 마리나와 새롭게 젊은 아벤게르가 왔다.
“학생입니까?”
“올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전공은 무엇입니까?”
“스페인어와 영어입니다.”
“그렇다면 마리나와 전공이 같은데 혹시 마리나가 선생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리나는 나의 스페인어와 영어 선생이고, 사실을 말하면 제 아내입니다.”
내색은 안했지만 선생이고 부부라고 해서 마음속으로 좀 놀랬다. 작년에 결혼해 서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는 부부는 아직 신혼의 단꿈 속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규모가 굉장히 컸다. 입장료 말고 작은 자수품 전시를 하는 곳도 입장료를 받아 아무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어제도 그렇고 너무 돈을 밝히는 종교단체가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였다.
이곳에서 드네페르 강과 신도시를 내려다본 뒤 성당을 한 바퀴 돌고 종탑에는 또 돈을 받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고 동굴 수도원 가는 뒷문으로 나왔다. 화장실을 들렸다가 동굴 수도원으로 갔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소속인 이 수도원은 황금색 지붕으로 장식된 웅장한 건축물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곳의 진짜 볼거리는 교회 건물들 아래 숨은 지하 동굴에 있다. 동굴교회에는 산체로 미이라가 된 수도승들이 있는 지하 미로가 있고, 한 때 스키티아인의 금을 저장했던 곳이고, 박물관으로 쓰인 우아한 모자이크 건물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이 중심역할을 한 동굴 수도원(Caves Monastery)은 1051년에 건설되었다. 8~9세기. 동슬라브 민족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 키예프 공국)가 키예프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키예프 루시가 동방정교회를 공식 종교로 채택한 1051년, 그리스 성자 안토니는 그를 따르는 페오도시와 함께 지금의 페체르스카야 수도원 자리에 동굴을 팠다. 개미굴처럼 여러 개의 동굴이 이어진 서늘한 지하. 성 안토니와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판 이 동굴에서 예배를 올리고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죽었고, 천 년이 흘렀다. 성 안토니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은 몸이 이곳에 있다. 지하 동굴은 기온이 서늘하고 공기가 건조하다. 지상에 겨울이 가고 다시 여름이 찾아오기를 천 번 반복되는 동안, 몽골,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키예프를 지배하고 거쳐 간 동안, 소련이 등장하고 붕괴한 그 오랜 세월 동안, 지하 동굴은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로 죽은 성자의 몸을 감싸며 자연적인 미라를 만들어냈다.
동굴 수도원을 들어가기 위해 여자들은 스카프와 치마를 입게 되어있고 남자도 반바지 차림이라면 치마를 걸쳐야 한다. 입구에서 산 노란 초에 불을 켜 들고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몇 군데 이곳에서 죽어간 성자들의 미이라가 놓여 있어 서늘한 지하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대를 걸었던 스키타이 황금 전시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청소 하는 날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역사보물 박물관(Museum of Historical Treasures of Ukraine)
국립 우크라이나 역사박물관의 지부인데 ‘스키타이 황금 박물관(Museum of Scythian gold)’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박물관은 키에프 페테르스크 동굴성당(Kiev-Pechersk Cave monastery) 지역에 있는데, 스키타이 왕의 부장품에서 나온 스키타이 접시와 병들을 볼 수 있다. 이 보석 컬렉션은 유명한 “황금 가슴장식”으로 스키타이 왕의 가슴장식품을 알 수 있다. 이 장식품은 1971년 드니프로페트롭스크(Dnipropetrovsk) 지역의 깊은 동굴 속에서 발굴한 것이다. 스키타이를 멸망시킨 사르마티아인 여왕 무덤에서 발견한 고대 동방의 금장식과 옛날 러시아 장인이 만든 14~16세기 유물도 볼 수 있다.
동굴 수도원을 나와 우리는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동양에서는 절 옆에 채식식당이 있듯이 이곳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은 식당이 한 군데 있었다. 이곳에는 신부님들도 와서 식사하는데 값이 싸고 메뉴들이 간단해 간단히 식사하는데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낮밥을 먹고는 다시 두 팀으로 나누어 금 박사와 교수님 부부는 박물관 탐사에 나섰다.
마리나․아벤게르 부부의 안내로 소피아성당 맞은편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푸느쿨라를 타고 강가로 내려았는데 집라인 타는곳은 다른 언덕에 있었다.
집라인을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가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드디어 강이 보이는 언덕이 나타났고 그곳에서강 건너편 백사장이 있는 곳까지 집라인을 탈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었다. 여권을 보여주었더니 우리 부부는 경로우대를 받아 50% 할인해서 100그나브로를 받는다. 윤지와 진호도 학생이라서 같은 할인율이 적용되고 진호 엄마는 200그나브로를 냈다. 무게가 더 나가는 사람이 아무래도 먼저 도착하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강가를 가로지르면서 흐르는 강물 위를 날랐다.
돌아오는 차를 잡는데 시간이 걸려 5시에 갖기로 한 모임은 6시가 되어서야 가까운 식당에 가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먹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관광에 도움을 준 이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지 못하고 우리끼리 마무리 모임을 갖기로 해서 그냥 보내서 미안했다.
그리고 8시부터 12층 로비에서 모여 지난 두 달동안의 여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은 계획에서 돌아와 보고를 마칠 때까지입니다.”
이렇게 전제를 했지만 단원 모두 그 간의 일정에서 느낀 점을 말하는 시간을 가지므로 해서 사실상 일정은 모두 끝난 것이다. 이제 무사히 마지막 아무 탈 없이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키에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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