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의 한 사원에서 재가불자가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다.
한국의 한 사찰에서 49재를 봉행하고 있다.
병신(丙申)년이 밝아 왔다. 불교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매해 정초에는 절마다 불교의식이 성황을 이루었다. 절에서는 정초부터 보름날까지는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고, 스님들은 정신없이 움직여도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절마다 분주한 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었다. 불과 5년 전 10년 전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불공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오랫동안 한국불교에서 불교의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고, 사찰의 수입은 불교의식인 불공 시식(제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물론 대형 사찰은 입장료라는 수입이 있지만, 군소사찰들은 불공 시식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공 시식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정초 기도불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봉축 연등달기와 장등 기도 등이 아니면 사찰운영이 어려울 지경이다. 이제 군소 사찰에서는 지전(부전)을 두는 사찰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산중에 있는 대부분의 대형 사찰은 문화재 관람료가 아니면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수입이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재 관람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고 불전 수입도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사찰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사찰 수입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찰수입 감소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경제현상을 들기도 하고 불교신자의 감소를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일부 재가단체에서는 사찰재정의 투명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그래도 사찰에는 수입이 상당하다는 추측이다. 정확한 통계가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타종교에 비교해서 불교 사찰의 수입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수입의 다과를 떠나서 구체적인 통계가 신도들에게 공개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찰들은 대부분이 개인사찰이다. 공 사찰은 전체의 5분의 1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공(公) 사찰이란 조계종의 사찰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전통사찰이 여기에 속한다. 내가 아는 한, 전통사찰이라고 해서 수입이 많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설사암이 수입이 월등할 수도 있다. 사찰마다 운영의 묘에 따라서 수입의 편차가 있겠지만, 대체로 한국의 사찰들은 지금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다간 얼마가지 않아서 문을 닫아야할 사찰이 속출하지 않나 하는 우려를 하면서, 이 문제는 결국 불교의 생존에 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봐서 매우 심각한 징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찰이 문을 닫으면 불교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속에 불교가 있다는 이상론은 어쩌면 공허한 허언(虛言)일 수가 있다.
이 글에서 필자의 논점은 불교의 생존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의 주류 종교로서 생존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을 피부로 체감하면서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매우 위험한 수위에 까지 이르렀다는 진단이다. 시대적인 변화와 사람들의 생각이 비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할지라도 일부 사찰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불교신도수가 줄어들어도 신심이 돈독한 신도는 있으며, 이 분들이 어떤 사찰에 집중적으로 몰린다면 이런 사찰은 외부의 경제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불교는 지금 어려운 국면에 처한 것은 사실이고,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마저 어렵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이런 긴급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없는 것일까. 나는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방안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가의 독살이(개인위주의 삶) 청산이요 지나친 조사숭배 불교의 지양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비롯됐다. 사찰은 부처님의 승가 공동체로부터 시작됐다. 비구들이 함께 모여서 부처님께서 교시(敎示)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수행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재가의 공양을 받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설법(法施)을 해 주는 역할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부처님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양을 받든지 아니든지 간에 비구들은 깨달음의 지혜를 중생들에게 전파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되고 승가의 전통으로 확립되어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승가공동체이다. 승가공동체는 비구들이 함께 사는 공간이다. 경우에 따라서 재가도 함께 살 수는 있겠지만, 재가의 삶과 비구승가의 삶은 다르다. 비구승가의 삶은 율장이란 규칙에 의해서 수행전법 생활을 해야 한다. 물론 재가도 5계 10계정도의 윤리도덕적인 규칙을 지키지만, 비구승가에 비해서 지키는 규칙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업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재가가 지키는 규칙이 가볍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계목(戒目=규칙 수)이 얼마 되지 않을 뿐이지 지키고 지니는 것은 비구승가와 다를 수 없다. 비구승가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런 원칙을 잘 지켜서 내려오는 불교가 바로 상좌부 불교이다.
상좌부의 비구 승가는 이런 원칙을 율장에 의거해서 잘 지키는 계율에 중점을 두고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수행하고, 재가의 공양을 받으므로 전법 포교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또한 이런 전통을 지켜가는 것은 계맥(戒脈)으로서 계승해 간다. 지금 실론이나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 권에서는 이런 전통을 그대로 구현해서 사원은 비구 공동체의 승가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수 백 명 수천 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수행전법포교에 본분을 다하고 있다. 중국불교도 대승불교이지만 빅슈(승려)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티베트불교권 라마(빅슈)들도 공동체 생활이 원칙이다. 일본은 계맥의 단절에 의한 계율이 지켜지지 않는다. 국가가 계맥을 강제적으로 단절시켜 버렸다.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다수의 동의에 소수는 힘을 못 쓰고 말았지만, 일부 군소 종파는 독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불교로 눈을 돌려보자. 비구 대처가 혼재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세가 자꾸 약해지고, 그나마 승가 공동체 또한 무너지기 직전이다. 독살이(비구가 혼자 사는 것)가 실제로 많고 용인되고 있다. 게다가 자기 문중의 큰 스님을 조사(祖師)로 격상, 숭배하여 찬탄하는 불사를 하는 것이 유행이다. 문중이 크고 제자 잘 만나면 하루아침에 조사로 격상되고, 떠받들어진다. 문중이 미미하거나 힘이 없으면 객관적으로 훌륭한 분이지만, 빛을 보지 못한다. 독살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문제는 불교교세의 강약이다. 독살이가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신도 수가 늘어난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겠지만, 불교신자 수는 자꾸 줄어드는데, 독살이는 늘어만 간다면,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불교승가의 원칙에도 벗어난 일이지만, 한국불교의 생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문제이다.
과감하게 이런 현상을 타개해서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 불교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함께 사는 공동체 생활의 구현이다. 적어도 몇 개 사찰(총림) 정도는 수백 명이 승가공동체를 형성해서, 수행 교육을 제대로 해야 우리 불교가 면면히 계승된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사찰은 큰데, 승려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 지키려고 하다가 다 잃을 수도 있기 때이다. 독살이 생활에 조사 선양만이 능사가 아니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대중 불교를 해야 하고, 불보살을 숭배하고 존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에다가 일제불교의 영향으로 아직도 우리 불교의 참모습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너무 불교를 이상적인 이론불교와 선불교만을 강조하고 도교적인 불교를 하다 보니, 불교 본래의 본분에서 자꾸 벗어나는 이상한 방향의 불교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다간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는 불교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고 재가 법사(포교사)들에게도 기회를 줘서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불교를 발전시킬 궁리를 해야 한다고 제언해 본다.
해동선림원 지도법사=보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