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불교경전이라 하면 한역 대장경을 많이 연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처음부터 어렵고 복잡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펴신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수한 외래 문화의 도입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경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부처님 스스로는 당신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저서나 기록 또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관하거나 전승시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나 신도들이 머리 속에 기억하여 정리하고 보존, 전달해 왔을 따름입니다. 수백년 동안은 글자로 베껴 쓰는 일도 없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설법 내용을 제자나 신도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로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한 마디도 어긋나지 않게 기억 속에 간직하기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설법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줄거리만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내용의 파악에 있어서도 사람들이다 똑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설법을 듣고도 듣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나자, 사소했던 이러한 견해 차이가 보다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우려가 발생하여 자신의 견해를 부처님의 것인 양 주장하는 사태도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 분의 실제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해 둘 필요성이 제기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청취한 제자들이 전체 회의라 할 수 있는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불제자들의 회합을 ‘결집’이라 하는데, 비록 이 모임의 결과가 문자화되지는 않았지만, 이 모임에서 결정된 내용들이 후대에 소위 경전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부가 있지만,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당시의 상황과 이에 관한 이야기의 전통을 고려할 때, 이 회합을 일단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첫머리에 여섯 가지의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석존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성취(信成就 : 여시如是)와
내가 직접 들었다는 문성취(聞成就 : 아문我聞),
설법의 때를 명시하는 시성취(時成就 ; 일시一時),
설법을 한 것이 붓다였다는 주성취(主成就 : 불佛),
설법한 장소를 밝히는 처성취(處成就 : 재사위국在舍衛國),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를 밝히는 중성취(衆成就 : 여대비구與大比丘) 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결집
첫번째 경전 편찬 회의(第一結集)
부처의 입멸 소식이 들리자 일부의 수행자들은 부처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에 놀란 마하가섭(당시 수도승단의 리더)은 부처의 입멸 직후 왕사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승단의 대표를 소집, 경전 편찬 회의를 개최합니다.
이 회의는 마하가섭의 총 주재하에 아난다가 경(經)부분을, 그리고 우팔리가 계율(戒律) 부분을 각각 주재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암송(暗誦)의 형식으로 편찬된 경과 율들은 500명의 대표들에 의해 수정, 보완, 재확인된 후 수행승단 전체의 이름으로 공포되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이 500명이었기 때문에 이 회의를 <오백 결집>(五百結集)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편찬된 것은 주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원시근본경전(장부, 중부, 증지부, 상응부의 경전들)과 율장의 기본 골격이 됩니다.
두 번째 경전 편찬 회의(第二結集)
불멸 후(불멸후) 100년경(B.C. 3C)이 되자 계율적인 사소한 문제 때문에 수행승단은 두 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인 진보파(대중부)와 노장층을 주축으로한 보수주의적인 전통파(상좌부)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노장층들은 젊은층의 새로운 주장으로부터 자기들의 주장을 지키기 위해 당시의 상업도시 베샬리(비사리)에서 두 번째 경전 편찬 회의(第二結集)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회의를 주재한 이는 장로 야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700명의 장로들이 참석했다 하여 보통 <칠백결집>(七白結集)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럼 두 번째 결집의 불씨가 된 계율 문제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그 발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때 계율에 밝은 서인도 출신의 장로 야사가 상업도시 베샬리(중인도 마가다 지방)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베샬리에서 그곳 수행자들이 신자들로부터 금화(金貨)와 은화(銀貨)를 시주받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그는 베샬리 수행승들에게 “그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짓이다”라고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베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은 야사가 시주돈을 받지 않느다고 오히려 화를 내었다. 야사는 이 풍습을 계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결국 베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에게 배척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베샬리의 수행승들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숲속의 생활로부터 승원(僧院)생활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래서 화폐가 필요하게 되어 신자들로부터 돈을 시주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사는 이러한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격분했던 것입니다. 야사는 그 후 서인도와 동인도로 가서 그곳의 장로들에게 베샬리의 사정을 이야기한 다음 응원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동인도와 서인도의 수행승단에서는 각각 4명의 대표를 선발, 즉시 베샬리로 가서 젊은 수행자들을 상대로 돈의 시주받음을 비롯한, 계율에 위반되는 열 가지 사항(十事)들을 지적하고 옳고그름을 장시간에 걸쳐 토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베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은 풍습은 모두 계율에 어긋나는 비법(非法)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장로단(長老團)의 이름으로 시정을 요구했지만, 베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은 판정에 불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판정에 불복하는 진보파(大衆部)와 이 판정을 내린 보수파(上座部)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경전 편찬 회의로 이때 주로 <율장>(律藏)이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경전 편찬 회의(第三結集)
불멸 후 200년경(B.C 2세기경) 아쇼카왕 당시 수도 파탈리뿌트라(현재의 파트나)에서 세 번째 경전 편찬 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해이해진 교단을 정비하고 외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1000명의 대표들이 모여 <삼장>(三藏, 즉 經藏, 律藏, 論藏) 전체를 편찬했는데, 그 편찬 대표는 목갈리뿌트라(목건련제수)였습니다. 이편찬 회의는 무려 9개월간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를 <천인 결집>(千人結集)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경전 편찬 회의가 끝난 직후 스리랑카 등 각 지역에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들이 왕명(王命)으로 파견됩니다.
네 편째 경전 편찬 회의(제4결집)
① 제1설, 소승권의 편찬 회의설 남방불교권의 이 편찬 회의설은 스리랑카의 「장사(Mahavamsa)」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제 3결집 후 아쇼카왕이 왕명으로 불교 전법사들을 각지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아쇼카의 아들 마힌다 장로는 4명의 전법사와 함께 불교 전법의 임무를 띠고 스리랑카에 가게 되는데, 그가 도착하자 즉시 그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전(口傳)으로 전수받기 위한 경전 편찬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때 모인 인원은 16,000명이었다고 전해지며, 이어서 B.C 1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경전 편찬 작업이 개최되어 남방권에서는 이를 <네 번째 경전 편찬회의>(제4결집)로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이 편찬 회의는 마하테라라키타의 주재하에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하며, 이때 편집된 문헌은 <경>, <율>, <논>의 팔리 삼장(三藏) 일체와 기타 이에 대한 주석서 일체였다고 합니다. 알로까 동굴에서 편찬 작업이 열렸기 때문에 이 경전 편찬 회의를 또한 <알로까비하라 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때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팔리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잎에 문자로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통 패엽경이라고 하여, 불경이 문자로 된 최초의 일이라고 전합니다.
② 제2설, 대승권의 편찬 회의설 대승 불교권의 자료에 의하면, A.D 2세기경 카니시카왕 당시 지금의 인도 캐쉬미르 지방에서 네 번째 경전 편찬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협존자와 세우에 의해 주재된 이 회의에는 500명의 대표가 참석, 기존의 경, 율, 논 삼장(經律論三藏)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이 덧붙여졌으며, 이때 덧붙여진 주석서가 후에 「대비바사론」 200권으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밖에도 후대로 내려가면서 스리랑카, 타일랜드, 버마 등지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몇 번에 걸쳐 경전 편찬 회의(結集)를 개최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첫 번째(第一結集)에서 네 번째(第四結集)까지를 정식 경전 편찬 회의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이렇듯 첫번째 경전 편찬 회의(제1결집)때 암송의 형식으로 구전(口傳)되어 내려온 경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B.C 1세기 중반부터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문자로 기록된 경전들을 보통 팔리어 삼장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팔리어는 인도 서부 지방(마가다 지방)의 서민들이 쓰던 옛 언어로서 문자가 없는 구전(口傳)언어였다고 합니다. 이 <구전언어>가 B.C 1세기 중반부터 스리랑카의 알로까 동굴에서의 경전 편찬 작업을 계기로 작 지방의 문자 형식을 빌어 종려나무잎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후에 제작된 대승경전 일체는 팔리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범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스크리크어는 인도의 브라만 사제층에서 옛부터 사용해 오던 고급언어였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경전의 기록이 팔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옮겨갔다는 것은 곧 불교 자체가 힌두교 문화권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 B.C 3세기경 두 번째 경전 편찬 회의(제2결집)
를 계기로 <원시 근본 경전>의 골격이 성립된 이래 B.C 3세기 이후 ~ A.D 1세기 이전에는 원시 근본 경전인 오부(五部) 경전 이외의 소승경전들이 제작되었던 것입니다. A.D 1세기경에는 베샬리 진보파(대중부)의 정신을 이어받은 일단의 급진주의 불교도들에 의해서 불교의 혁신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소위 대승불교 운동이었다.
이때 맨처음으로 제작된 대승경전은 주로 반야부 계통의 경전들(반야심경, 금강경 등)이었습니다. 잇달아 「법화경」,「유마경」,「화엄경」,「정토3부경」을 비롯하여 「능가경」,「해심밀경」등이 제작되었습니다. 또, A.D 7세기 이후에는 「대일경」,「금강정경」등 밀교 계통의 경전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경전들은 <원시 근본 경전>에서 <소승경전> <대승경전> <밀교경전>의 순서로 제작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선의 어록(語錄)들은 주로 중국의 선승들에 의해서 씌어졌는데, 그 시발점은 달마(A.D 520)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아니라(이 책은 달마 자신의 저술이 아니라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3조 승찬( ~ 606)의 「신심명(信心銘)」으로부터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선의 어록들>이 성립 과정에는 중국의 노장(老壯)사상의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