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능력을 위한 의식변형실습<내면작업 13일째>
○ 이 순간은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일 뿐이다.
This instant is the only time there is.
과거에 있어서 선입견과 미래로의 나의 투사는
현재있는 평화를 향한 내 목적을 좌절시킨다.
평화는 과거나 미래에 발견될 수 없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과거는 끝났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온전히 이 현재의
순간속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킴에 의해
과거-미래 환상없이 오늘을 살기로
결심을 한다: 이 순간이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성찰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 실제로 과거와 미래는 실재(reality)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후 현대물리학에서 그리고 그것을 응용한 SF 영화에서 보듯이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과 중력의 밀도에 의해 시간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이 공간에 매어 있음을 밝혀내었고, 이에따라 ‘시공간’이란 말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간이란 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변형되어지는 과정을, 마치 실재라는 사과를 얇게 슬라이스로 나누어 놓은 것과 같은 공간의 변형들의 모음인 것이며, 이를 마치 우리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더 쉽게 이해하자면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오는 동작들은 시간의 흐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개 필름들의 연속체로서 이어진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 같다.
시간이 공간의 변형에 대한 슬라이스들의 집합이며, 오직 과거와 미래는 기억의 잔재라는 이해를 하게 될 때, 우리는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다시 뜨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한번도 현재에 집중되어본 적이 없이 대부분 일상에 있어서는 과거와 미래라는 기억의 흐름속에서 갖혀 있어서 제대로 현재에 깨어 있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에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도 명상을 통해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을 그렇게 기억이라는 추상성속에 머물러서 제대로 실제적(realistic)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의식을 요구한다. 여기에 해방의 유일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트레스나 더 심한 트라우마는 정확히 우리의 기억의 재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에로 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은 추상성에 머물러서 꿈을 꾸듯이 그 꿈을 현실로 이해하며 반응하는 현상이다.
현재를 이해하거나 사고하는 것을 넘어 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의 경험은 언제나 살아있는 그 무엇의 현재적인 순간의 연속성을 지닌다. 거기에는 기억이 아니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집중된 주목하기를 통해, 일련의 체험들로 연속되어지기 때문에 파편화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봄은 이를 과거의 기억으로서 ‘사고(thought-과거형)’와 ‘살아있는 생각(thinking-현재진행형)’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대화는 사고에서 생각으로 우리의 의식을 바뀌게 만들어 새로운 행동과 잠재적인 가능성을 출현시킨다고 한다.
체험으로써, 살아있는 생각에 내가 연결되어 있다면, 즉 현재 속으로 들어가 있다면 거기엔 오직 평화가 존재한다. 어디에 발이 치여서 아픔이 몰려올 때, 기억이 아니라 그 아픔에 온전히 현재로 있다면 아픔이라는 해석과 다른 현실성을 경험할 수 있다. 평화가 살아있는 존재의 상태라면 당연히 그것은 오직 현재라는 순간 속에서 사고라는 찌꺼기 없이 있을 때 오직 현재가 주는 선물이 된다. 그렇기에 다음을 인정하게 된다: “과거에 있어서 선입견과 미래로의 나의 투사는 현재 있는 평화를 향한 내 목적을 좌절시킨다.” 평화는 현재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안에서 발견된다. 현재는 언제나 평화이다.
평화가 현재의 다른 모습이라면,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시간이라고 이해된다면, 우리에게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곧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왜냐하면 평화가 아닌 불안과 걱정 그리고 수많은 두려움의 변형들은 그 자체가 기억이라는 추상화와 투사의 왜곡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추상화와 투사의 기억을 걷어내면 오롯이 현재라는 지금 이 순간뿐이며, 그 현재속의 몰입은 생생한 조화를 가져오고 평화는 이를 통해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다. 평화는 지금 이 순간에서만 찾아오는 것임을.
- 박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