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능력을 위한 의식변형실습<내면작업 14일차>
○ 과거는 끝났다.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The past is over. It can touch me not.
현재에서 과거를 다시 살기를 지속하기만 한다면
나는 시간에 노예가 된다.
과거를 용서하고 놓아보냄으로서,
나는 현재의 순간으로 가져온
고통스러운 짐들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이제, 나는 과거의 왜곡없이
현재에서 자유의 기회를 주장할 수 있다.
오늘, 자유는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내 목표이다:
당면한 지금 현재에서만 살고 있음으로서
나는 과거 통증과 고통으로부터
놓아졌다는 것을 주장하길 선택한다.
(성찰
과거라는 기억이 의식(consciousness)에 문제가 되는 이유는 고통의 문제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경계는 위협에 대한 인류의 수백만 년간의 학습으로 인해 형태공명의 원리에 따라 자극에 대한 자동반응을 하도록 설계되어 왔다. 수렵채취의 생존본능에 따라 형성된 소뇌(파충류 뇌)의 기능은 생존이라는 자기 보호와 자기 방어에 있어서 즉각적인 작동을 하도록 한다. 위험한 상황과 대상에 대한 기억은 이후에 출현하는 유사한 상황과 대상에 대해 공격하기-회피하기-얼어붙기라는 자극반응을 일으키도록 프로그램화되고 우리는 이것을 신경조건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수백만 년의 인류사에 있어서 최근 이삼십년은 컴퓨터와 그 이후 스마트폰과 같은 IT의 출현으로 인해 전적으로 다른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과거의 분리와 고립이 허락되었던 상황과 달리 이른바 ‘초연결의 시대(Age of Hyper-connection)’에 접어들면서 위험의 상황과 대상이 완전히 바뀌어진 것이다. 바로 초연결의 상황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분리와 관계의 단절이 위험의 조건으로 전환되어졌다는 의미이다.
분리와 단절이 위험의 핵심이 되는 새로운 세기로의 진입은 이원적 사고에서 유기체적 사고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는 살아있는 실재와 사고라는 추상과의 분리에 대한 치유를 요청한다. 우리의 사고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호함과 복잡성에 대해 사고와 기억이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점을 넘은 지 오래이고, 이제 조만간에 인공지능이 기억을 넘어서는 ‘특이점(singularity-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 스스로 자율화되는 지점)’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서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문명에서 가장 큰 파트너였던 자연과의 관계에서 로봇이라는 기계와의 새로운 관계로서의 자리매김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사고와 기억을 인공지능이 맡는다는 게 인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어놓고 있는 셈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마트화된 세상에서 기억과 사고로부터의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정체성과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욕구를 발화시킨다. 이 새로운 문명은 ‘현존하기’라는 현재와의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도록 이끌게 되었다. 70년대만 해도 달라이라마, 토머스머튼, 틱낫한, 에크하르트 톨레 등의 소수 영적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현존(Presence)에 대해 다양한 분야에서, 이를테면 종교영역, 심리학 영역(예, 게슈탈트심리학, 인지심리치료, 재평가상담, EMDR...) 그리고 MIT의 학습조직론(예, 오토샤머의 U이론) 등에서 나온 기업경영 등에 있어서 현존이라는 말은 일상화되고 새롭게 주목하게 되는 말이 되었다.
앞서 진술한 대로 시간은 기억이며, 고통의 원인이 거기에 있고, 지금의 새로운 문명은 또한 현재에 대한 새로운 주목을 환경적으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일부 종교가나 철학가의 몫이 아니라 보편화된 관심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웰빙(well-being)은 이 시대의 문화적 핵심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현존’에 대한 새롭게 도래하는 내적·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영적인 신비주의라는 특수 영역의 소수에서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대중화된 보편적인 인식의 주제가 되면서, 의식-실재, 고통-자유, 시간-몰입등의 인식문제는 잘 지내기(well-being)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한 인식 주제들의 핵심고리는 존재-인식-행동을 연결하는 실천(praxis)에서 평화의 능력으로 경험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새로운 이해이다.
과거를 용서하고 놓아보냄으로서,
나는 현재의 순간으로 가져온
고통스러운 짐들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용서는 부당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나의 관대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과거를 놓아주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수행으로서 심리적인 차원을 말할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존재론적인 기초를 놓는 인식론적 차원을 여는 길이기도 하다. 용서가 시간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줄 수 있게 한다는 것과 그래서 온전히 현재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은, 용서가 단순히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존재와 인식에 있어 핵심이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마태공동체가 전하는 기쁜 소식(‘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제자직에 있어서 새로운 성전의 가장 내밀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속에 주기도와 용서를 핵심에 놓았다는 사실이다. 주기도는 궁극실재와의 연결이 핵심이며 용서는 두려움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힘을 준다. 아버지 하느님과의 연결과 용서의 수행은 지배체제를 전복시키는 지혜와 힘이 되고, 우리를 두려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것이 마태기자의 증언이다. 이는 예수의 두 지침인 동시에 유대전통의 핵심인 신을 정성·뜻·마음·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속에 반향되어 나타난다. 주기도와 용서는 이것에 대해 각각 대응하며, 용서는 타자속에 투사된 나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타자에 대한 행위가 아니라 나의 자유를 강화하는 재귀적 성격을 띤다.
용서라는 내려놓음과 내보냄을 통해 나는 현재의 순간에 되돌아오고, 그 되돌아옴을 통해 집(home)을 비로소 되찾아 지면서 나는 무거운 여행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과 편안함속에 있게 된다.
- 박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