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능력을 위한 의식변형실습<내면작업 15일째>
○ 오직 내 비난만이 나에게 손상을 준다.
Only my condemnation injures me.
비난없이 나는 죄책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다른 이들을 해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또한 나는
그들이 나를 해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오늘,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임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모두에게 확장시킴으로 인해
내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나는 비난의 감옥으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와 나 자신을
기쁘게 석방시키기를 선택한다.
(성찰
이 의식변형작업에 있어서 핵심은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의해 얻은 통찰을 자기 자신, 타자 그리고 세상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는 커뮤니케이션을 자신, 타자, 그리고 세상과 하고 있으며, 평화의 실현은 자신이 무엇을 주는가가 자신이 무엇을 받는가를 결정한다는 원리에 기반한다는 인식에 의존하고 있음을 실습하는 데 중점을 둔다.
내가 주는 것이 내게 주어진다는 단순한 이해는 결국 내가 사랑의 에너지에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의 에너지에 있는가에 따라 내가 무엇을 돌려받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내가 남을 비난 혹은 공격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내가 나를 비난 혹은 공격하게 된다. 즉, 내가 하는 비난이 나를 손상시킨다. ‘비난의 감옥’에서는 내가 상대방을 비난의 감옥속에 넣을 수 있지만, 대신에 그 철장밖에 있는 나 또한 비난받는 그 상대방을 응시하는 교도관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철장의 이편에 머물러야 하는 또 다른 재소자로서 있는다. 이것이 ‘비난의 감옥’이 지닌 역설이다. 나 자신도 그 철장과 연관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된다.
비난의 감옥이 작동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 비난이 나오는 마음의 심상안에 이미 두려움의 에너지가 발현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가 숨쉬는 전체 공간을 뒤엎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이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내가 남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나를 취약하게 만든다. 그런 결과에는 두 가지 연결을 통해 일어난다. 하나는 내가 그러한 두려움의 공기를 마시기에 나를 해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하나는 내가 남을 해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우선 자신의 정체성과 의식을 두려움에로 돌려놓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해치고서야 남을 해치게 된다.
의식의 변형 실습은 무엇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고 단순히 ‘에너지’를 다르게 선택한다는 단순한 실습에 무엇을 맞이하는지에 대한 열쇠가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다. 비난, 죄책감, 두려움의 에너지와 의식이 보여질 때, 함없는 행위로서 에너지를 전환시킨다. 사랑의 에너지로의 문을 여는 것, 단순히 그 행위에 자신을 허락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마음의 습관이 징벌과 보상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강한 저항이나 공격의 힘이 자신이 직면한 문제나 도전에 ‘유효’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왔기 때문에 단순하고 연약해 보이는 선택에 의심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봄의 전경을 살펴보라. 강하고 딱딱한 죽음의 잔재속에서 뚫고 나오는 것은 연약하고 가녀린 새싹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공격 혹은 비난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러한 공격과 비난의 힘을 빼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용서’이다. 용서는 그러한 공격이나 비난의 힘을 무화시킨다. 우리가 두려움의 에너지에서 갑자기 사랑의 에너지로, 즉 갑작스럽게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양자 사이의 중간의 전환의 공간속에 잠시 머무를 게 되는 것이 바로 ‘용서’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공격이나 비난의 힘을 무화시키면서 사랑의 빛이 출현하게 될 공간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비난의 감옥이 허물어지고 더 이상 비난과 해침이 느껴지지 않음과 더불어 사랑의 에너지를 타고 자유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