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5 나라(奈良)에서의 민족교육(전편)
(글 황리애)
견실한 노력, 간절히 바라던 자주학교에로
나라현에서는 1960년대 말까지 오후 야간학교의 형태로 민족교육이 이어졌다. 나라 조선초중급학교가 개교한 것은 1969년 4월 1일. 조립식 가건물 교사였지만, 드디어 체제를 갖춘 자주학교가 완성된 것이다. 이듬해 9월 12일, 현재의 장소에 철근구조의 새 교사를 준공. 이 날을 학교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 1958년, 사쿠라이市 조선인초급학교와 동네 아이들 -
60년대 이전의 배움터
나라현에서는 해방 직후의 민족교육에 관해 기록된 자료가 없어 당시를 알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나라현 동포 소철진(邵哲珍 55)씨는, “때마침 나라현에서도 역사를 정리해두자 생각해서 1931년 출생한 류봉정(劉鳳鐘)씨라는 분에게 ‘나중에 옛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부탁을 했던 참인데, 작년 말에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돌아가셨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지역에서 20년간 가족이 조선요리점을 운영해 온 문병호(70)씨와 정말선(70)씨는 58년을 전후해서 나라(奈良), 텐리(天理), 사쿠라이(桜井), 우다(宇陀), 고죠(五條), 요시노(吉野) 등 현내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존재했다고 한다. 문씨 자신은 58년부터 사쿠라이 시에 있던 조선인초급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윗세대 어른들이 종종 학교에 모였다고 말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모두들 ‘야간학교’라고 불렀지요. 동네에 20명 정도였을까. 일본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죠. 학교에 탁구대가 있었기 때문에 놀러왔어요. 학교 자체는 도중에 운영되지 못하게 되거나, 어느 사이엔가 다시 시작되기도 해서 불규칙했어요. 학교가 재개되면 다시 ‘아야어여’부터 배웠죠….”(문씨)
“사회적으로 차별이 많아서 당당하게 우리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야간학교였어요. 머리가 좋은 어른들이 많았지만, 사회에서 그 실력을 발휘할 장소가 없으니까, 이런 동포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어요. 우리말과 조선노래 외에 명절에 추는 어깨춤도 가르쳐줬어요.”(정씨)
- 개교 당시 나라초중급학교 -
4곳의 오후 야간학교
자주학교를 건설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
몇 년 후 창립을 목표로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출발했다. 66년, 각지에 있던 국어강습소를 3곳(나라, 사쿠라이, 요시노)로 합쳐서 도쿄 조선중고급학교에서 사범과 강습을 받은 동포들을 강사로 맞이해 오후 야간학교를 개교했다.
김정복(70)씨는 오후 야간학교 강사 중 한 사람. 교토 조선중고급학교에서 공부한 김씨는 고급부를 졸업하기 수개월 전부터 도쿄중고에서 단기 강습에 참가했고, 수료와 더불어 나라로 부임이 결정되었다. “교토 중고에서 두 사람, 도쿄중고에서 한 사람이 와서 각각 한 학교씩 담당했습니다. 선생님들은 흩어져 생활하고 아이들이 3명밖에 없는 날도 있어서 가끔 쓸쓸할 때가 있었지요.”
67년에는 여기에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한 강사가 부임해 오후 야간학교를 증설했다. 이러한 현내의 4곳을 기점으로 체계적인 자주학교를 만들기 위한 전단계로써 조금씩 본격적인 민족교육이 진행되어 갔다.
학생모집 활동에도 힘 쏟아
오후 야간학교 운영과 더불어 학생 모집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오사카 조고를 졸업한 문씨는 이 지역으로 돌아와 조은신용조합 직원으로 일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이 활동에 참가했다. 도쿄에서 찾아온 총련 영화제작소 스태프와 함께 선전차를 타고 현내를 돌며 민족교육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급했다.
“입학대상 연령의 아이들이 있는 집을 방문해 상영회에 초대했죠. 영사기와 필름을 가지고 동포의 집을 빌려 상영도 했어요. 잊을 수 없이 즐거운 추억입니다.”
그 외에도 동포사회를 떠나 조선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살고 있는 가정을 방문해 인연을 맺는 <동포 찾기>운동을 전개했다.
“마당을 슬쩍 들여다보고 ‘누비이불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동포 집’이라든가, ‘<宮>이 들어있는 이름이니 들어가 보자’라든가, 한 집 한 집 다니며 ‘혹시, 이 댁은 조선사람 아니십니까?’ 물으며 돌아다녔어요. ‘아닙니다’ 라며 대문을 닫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죠.”라며 웃는 정씨.
“어디선가 마늘 냄새가 나면 ‘이건 조선 사람의 냄새다!’라며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죠.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눈에 띄는 이름의 가정에는 모두 찾아갔습니다.”(문씨)
이러한 동포들의 노력이 있어 동포사회를 만난 가정도 많다.
그리고 1969년, 오후 야간학교의 경험과 동포 찾기 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나라 조선초중급학교를 창립했다.(카시하라시 橿原市)
아동·학생 수는 95명.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하기 때문에 이 해는 중급부 3학년은 받지 못하고, 중급부 2학년생 이하의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학교는 조립식 2층 건물의 가교사. 흙먼지가 날리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고 한다. 운동장이 없어서 운동회는 학교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카시하라 신궁의 부지 내에서 열렸다.
이듬해에는 정식 교사 준공을 위해 인접한 부지에서 수업과 병행해 공사가 진행되었다. 68년에 나라조선회관을 새로이 준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상공인을 비롯한 동포들은 계속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새 교사 건설중에 1970학년도 입학서류를 갖고 찾아온 보호자들 -
새 교사에서
1970년 9월 12일, 현재의 장소에 철근구조 3층 건물의 훌륭한 새 교사가 완성. 오후 야간학교에서 교단에 섰던 강사들을 중심으로 교원들이 갖춰졌다. 앞서 말한 김씨는 “제대로 된 학교가 생겼다는 기쁨이 있었죠. 1학년생 담임도 맡았는데, 6명인가 7명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매일 착실하게 학교 왔어요. 정말 기뻤습니다.”
교원들은 학교에서의 수업과 더불어 방과 후에는 다시 현내 각지로 나가 오후 야간학교를 열었다. 이 무렵의 오후 야간학교는 학생 모집 활동과 세트로 기울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나라 초중급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기에는 148명이 공부했다.
“증기기관차로 2시간 정도 가야하는 먼 지역에 사는 동포들을 만나러 갑니다. 동포들이 많은 노동자 합숙소 등을 찾아가 공부를 가르치고, 그 날은 그곳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학교로 오죠. 저의 외할머니 집에도 언제나 한 두 명은 선생님이 계셨어요. 75년쯤까지는 계속 했을 거예요.”
당시의 모습을 말하는 김정기(57, 나라조선학원 이사장)씨도 71년에 나라초중으로 편입했다.
나라초중급학교는 그 후 창립 20주년을 계기로 교사 증개축 공사를 실시한다. 2세, 3세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본 교사의 뒤에 이과실과 시청각실 등의 특별교실이 들어간 3층짜리 새 교사를 증설했다. (후편으로 이어짐)
*월간 <이어> 2018년 4월호에서
첫댓글 감동적인 민족교육의 역사를 기억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