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寅年, 호랑이의 힘찬 포효를…,
박 순
마지막 한 장 남은 辛丑年의 달력을 보며 壬寅의 검은 호랑이의 붉고 힘찬 태양을 기대한다. 날 저문 허허로운 들녘을 혼자 거닐면서 텅 빈 땅에 서 있는 밀려오는 고독, 이 해도 이렇게 훌훌히 떠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멀리 텅 빈 하늘에 까마귀가 긴 횡선을 그리며 날아 어느 임종을 앞둔 시인의 “까마귀 서쪽으로 날아가고,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시구가 시리게 마음을 적신다.
이른 봄, 파릇한 새싹을 내려다보며 싱그러운 상념에 젖어들었고, 한 여름의 모진 태풍에 꺾이어진 가로수를 보며 억센 삶의 숨소리를 느끼고, 찬 이슬을 머리에 이고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에 한해가 저문 것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또 다른 무게의 변화에 젖는다. 들판이란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 있어야 새로운 생명이 돋아날 수 있다. 열매를 맺고, 다시 쭉정이가 되고 그 빈 곳에서 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그 삶의 반복에서 평상이 있고 그 평상 속에서 모든 생명은 줄기찬 삶을 이어간다.
삶이란 본래,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으니, 돌아가는 것 또한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살다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니 그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이다. 오고 가는 것은 진정 무의미한 일일까.
고려 말, 함허당(涵虛堂 1376∼1433) 스님은,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사라 지는 것,(死也一片浮雲滅)/ 뜬 구름 자체는 철저하게 없는 것이니(浮雲自體徹底空)/헛된 몸 죽고 삶이 이러한 것을(幻身生滅亦如是)/이라 하였다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삶이란 본래 어떤 것이라는 그 분명한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그 삶에 대한 정의 또한 내릴 수 없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지에 따라 인생이라는 그림은 다른 색깔을 지니고 다가온다. 삶이 그러하니 그 죽음 또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뼘 쯤의 간격을 남겨 놓고 사라져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 해가 남기고 있는 공간만큼이나 남겨져 있는 나머지의 나의 삶을 느끼며, 지평선에 드리운 붉은 노을처럼 나의 인생 또한 아름답게 불태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살고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삶이란 내가 서 있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순간이라도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을 미래라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과거라고 하는 것이니 결국 우리들의 삶이란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이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텅 빈 벌판에서서 섣달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만을 마음속에 새기고, 감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며 기억하여 다가오는 壬寅의 해는 더욱 더 감사하고 또한 더욱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