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설 *-
그러나 보살들은 아무리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여 법을 구하여도 피로해 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경전에 참 많이 나옵니다.
특히 이 『화엄경』에 자주 나옵니다.
아무리 해도 피로해 하거나 싫어함이 없는것이 바로 정진인 것입니다.
'무수한 목숨과 목숨을 버리는 문'과 '고달픈 생각이 없는 문'과 '모든 중생의 시설과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문'의 세 가지는 십바라밀의 방편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은 힘에 해당되는 문이 나옵니다.
바로 모든 마(魔)를 항복받고 외도들을 제어하여 보살의 복과 지혜의 힘[力]을 드러내는
문입니다.
마구니를 항복 받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지혜에 관한 문이 여섯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혜 가운데에서도 '밝은 지혜의 문[明智門]을 말합니다.
지혜는 참으로 밝은 것입니다.
햇빛이 밝든, 등불이 밝든, 전깃불이 밝든, 우리들의 눈이 밝든,
밝은 것은 전부 지혜입니다.
지혜는 달리 다른 것으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처 세계의 모든 기술을 아는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내고, 모든 중생의 차별을 아는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내며, 모든 법의 차별을 아는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내고,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좋아함이 차별함을 아는 밝은 지혜의 문도 압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을 펴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 중생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이 중생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하는 그 차별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동사섭(同事攝)을 한다는 것은 그 중생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주다가 서서히 그 사람을 돌이키게 하고 마침내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중생의 근성. 행동. 번뇌. 습기를 아는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생들이 작고 있는 여러 가지 차별을 전부 다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저 사람의 근기는 저렇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는 그렇다,
이 사람의 번뇌는 이렇다,
나의 습기는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낱낱이 다 아는 밝은 지혜의 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번뇌도 각양각색입니다.
습기(習氣), 즉 습관도 가지가지입니다.
밥을 먹는것도 다르고 숨을 쉬는 것도 다르고 잠자는 것도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차별을 잘 알면 중생 제도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의 갖가지 업을 아는 밝은 지혜의 문과 모든 중생을 깨우치는 문을
나타내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 밝은 지혜의 문과 중생을 깨우치는 문, 이렇게 한 칠문(七門)은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도 지혜이고 이 십바라밀의마지막도 지(智)입니다.
보십시오.
일관되게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편식을 하지 말라고 십바라밀을 말하면서도 그런 십바라밀이 원만하게 수행되려면
지혜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가르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편식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은 수행도 편식을 합니다.
참선(參禪)만 좋다 해서 "마음만 깨치면 되지, 책은 뭣하려고 보나, 번뇌 망상만 쌓이지."
이러고 다닙니다.
마음의 원리를 알면 더 빨리, 더 밝게 깨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참선만 좋아한다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염불만 좋다하는 말씀도 없습니다.
경(經)만 좋다는 말씀도 절대로 없습니다.
'무엇무엇만 좋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한 가지만 주장합니다.
'이것만 해라.'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경전을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보더라도 대충『천수경』이나『금강경』정도나 읽고만 사람들이지, 부처님 경전을
전반적으로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경전에 대하여, 부처님의 사상에 대하여
견문이 좁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병에 걸리 것이죠.
편식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고루고루 닦으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병에 따라서 약처방이 다른 법인데 어느 병에라도 다 듣는 만병 통치약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의 근기가 다르고 취미가 다른데 어떻게 어느 한 가지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몰라도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에서 우리들이 모였을 때는
부처님의 사상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인 것입니다.
예수교에 가서는 예수의 사상을 배워야 하고, 유교에 가서는 공맹(孔孟)의 사상을
배워야 합니다.
불교에 들어와 가지고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아니하고 자기 짐작대로 떠억하니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입니다.
얼마만큼 깊고 넓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탐구하느냐 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사상을 일단 넓고 깊게 공부하는 것이 우선가는 일이고 그렇게 해 놓으면
편벽된 주장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떠한 고통에 지독하게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 병을 치료하려고 당분간 방편으로
한 가지만 하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 외에 전체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는 절대로 편협된 가르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엄경』이 천하에 제일 가는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언, 한 가지만 옳다고 하는
대목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한 곳에도 없습니다.
만약 ' 이것만 하시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지혜는 중생의 지혜로서 함부로 내세울 것이 아니고, 일단은 부처님의
지혜를 빌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빌리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변의 원칙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입니다.
경(經)을 떠나서 달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안하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고 이치(理致)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라는 간판 아래에 모였을 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 외의 주장은 단지
개인적인 주장일 따름이지 불교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