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설 *-
『화엄경』을 보면 계속 보현행(普賢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행을 하는 보현보살의 실천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불교예요, 불교는 한마디로 보현행을 닦는 것이고 보현행이라고 하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이「 입법계품」은 80권『화엄경』에서 제 39품인데 이「입법계품」하고 연결되어
「보현행원품 」이 『화엄경』의 마지막 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보현행원품 」은 『화엄경』의 결론이자 바로 불교의 결론인 것입니다.
"보현행원으로 살아가라."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십바라밀이 다시 한 번 더 차례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자세하게 살펴 보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만 짚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화엄경』에서 십바라밀을 거듭 이야기 하는 까닭은 "골고루 닦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에서 대체로 선정에 치우쳐 닦는 경우가 많은데 골고루 닦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음식도 편식하면 균형이 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고루고루 수행을 해야 원만한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화엄경』에서는 육바라밀에다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를 보태
원만수(數)인 십바라밀을 맞추었습니다.
그 십바라밀을 골고루 닦도록 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정신입니다.
꼭 참선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종국에는 보리수 아래에서 참선으로 이 우주의 실상을 깨달았지만
그 전에 설산(雪山)에서 인욕과 지계와 정진을 무섭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다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가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고르고 넓게 하여야 합니다.
물론 자기 취향과 자기 인연에 잔신의 능력이 다 다릅니다.
보시가 기쁜 사람은 보시를 주로 하게 되고, 선정이 참으로 즐거운 사람은
삼매에 드는 것을 주로 하게 되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절대로 편식을 권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자세히 보면 지혜에 치우쳐 가르침을 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가 우선시 되어야 다른 바라밀도 제대로 값어치 있게 닦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에서든지 지혜를 강조하고 있기는 합니다.
여기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한 글귀, 한 토를 위하여 무수한 몸과 목숨을 버리는 문'이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열반경』에 나오는 유명한 '설산동자반게살신(雪山童子半偈殺身)'이야기입니다.
아득한 과거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동자로서 하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는 산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법문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해서 이것은 생멸하는 법칙이다."
설산 동자는 세상에 이렇게도 좋은 법문을 누가 했는가 싶어 사방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험상궂게 생긴 나찰만이 거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찰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전에 '제행무살 시생멸법'이라는 법문을 그대가 했습니까?"
" 여기 나 말고 누가 도 있나? 당연히 내가 했지."
"그런데 그 구절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를 마저 들려 주십시오."
"나도 들려 주고 싶지만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그 공양을 재가 마련해 올리겠습니다."
"나는 사람의 뜨끈뜨끈한 피를 먹는다. 너의 뜨거운 피를 주겠느냐?"
" 제 몸을 반드시 공양해 올릴테니 나머지 법문을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 약속을 하고보니 자기 몸을 먼저 보시해 버리고 나면 법문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먼저 나머지 법문을 들려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생멸을 다 마치고 나면 적멸한 것이 낙이다."
적멸의 세계라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서 온갖 번별을 하는 그런 작용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마음을 내어 그 분별을 취하는 게 즐거움이 아니라,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생각마저도 다 잠자는 그야말로 그런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간
세계가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멸멸이 적멸위락'을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구 재촉을 합니다.
"자 이제 나머지 법문을 들려 주었으니 빨리 너의 뜨거운 피를 다오."
"잠깐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 몸을 바쳐서 들은 이 귀중한 법문을 저 혼자만 듣고
죽으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벌어 놓고서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마구 써대었습니다.
절벽이고 바위고 간에 여백만 있으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높은 가지에 올라 땅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나찰은 제석의 형상으로 변해서 동자의 몸을 받아 올렸습니다.
동자는 이 신명을 버리는 행으로 인하여 12겁을 초월할 수 있었다고합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여 모든 법을 물으면서도 고달픈 생각이 없는 문'이라는
대목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아무리 묻고 알고 묻고 알고 또 묻고 알아도 피로해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아이구, 맨날 그 소리, 누가 모르나. 힘들어 죽겠어."
우리들은 조금 해놓고도 이런 소리를 밥먹듯이 합니다.
알고보면 사실 아무리 많은 선지식이 각양각색의 소리를 하여도 결국은 그 소리이며,
한 소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