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에 대한 단상
바람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온갖 생명을 키워 내는 거룩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부수고 쓸어 가는 폭도가 되기도 한다. 그리움을 싣고 오는 꿈길이기도 하고 아픈 상처를 후비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하늬바람이 되었다 샛바람이 되고 미풍인가 하면 광풍이 되기도 한다. 끝내 시인은 바람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한다.
바람이 시인에게 말했다. 모양도 빛깔도 없는 자기를 두고 기분대로 이러쿵저러쿵 흔들어 대지말고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그러나 정작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저만치 가고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고 시침 때고 가고 있다. 흔들림을 당한 것들은?
가는 목의 예쁜 꽃이 뭇 꽃 앞에서 자신의 날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 꽃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예쁜 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바람벽에 나뭇잎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벽 속에 있던 바람이 그림자를 흔드는 것이다. 그림자가 흔들리니까 나뭇잎도 흔들린다. 나무잎이 흔들리니까 그림자도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갇힌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높다는 것은 시샘의 대상이다.
높은 가지는 바람이 흔들고 높은 자리는 아랫것이 흔든다.
칠월의 태양 아래 바람에 앞뒤로 파닥거리며 눈부시게 휘날리는 버드나무 잎을 보았는가! 그것은 햇빛에 손바닥을 데지 않기 위한 뒤척임이다.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발레리나의 영혼이 촛불 속에 깃들기 때문이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진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을 못살게 군 인간에 대한 지구의 분노가 아니고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깝죽대는 인간들의 삶이 코미디 같아 입 벌리고 웃는 것이다.
술이 사람을 흔들고, 사람은 풍경을 흔들고, 풍경이 취해서 비들거리다 쓰러진다.
시계추의 흔들림은 살아 있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료를 참지 못한 몸부림이다. 무료하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이다.
강 건너 불빛들이 강심으로 물구나무를 서 찬란한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란한 것은 허상이다.
손목 시계 속 작은 유사의 흔들림은 톱니바퀴를 돌리고 시계바늘을 돌리고 끝내는 지구를 돌린다.
흔든다는 것은 - 좋아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영원히 나를 버리지 마세요. 란 뜻이다. 적어도 강아지 꼬리에 있어선.
흔들리는 모빌들이 아기의 무의식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먼 훗날 바람이 되고 쓰나미가 되고 혁명이 될지도 모른다.
마천루는 아무도 몰래 자기 몸을 흔들고 있다. 몸의 유연성을 키워 오래 살기 위해서다.
흔들린 글자들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글자 속엔 악필(握筆)로 써 내려간 묵객의 처연한 눈빛이 있다.
흔들리는 물결 사이에서 부서지는 달빛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파편처럼 아름답고 슬퍼다. 물결은 강물이 연주하는 메스토 칸타빌레이기 때문이다.
흔든다는 것은 나이트클럽에선 춤이고 이별의 장면에서는 손수건이고 밤나무 아래서는 알밤의 낙하이며 고스톱 판에서는 곱하기 2의 공식이 된다.
식물에 있어서 흔들림은 녹색이 되기 위한 기도이다.
첫사랑,
그것이 유년기에 찾아오면 파닥거림,
사춘기에 찾아오면 떨림,
장년기에 찾아오면 흔들림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재롱을 떠는 것이다. 재롱을 떨 수 있는 것은 뿌리를 굳게 내린 어미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싸이키 조명아래 청춘이 흔들거리는 것은 한쪽 가슴에 구멍이 생겨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구멍은 꿈 사랑 미래 순정 등이 빠져나간 공간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영혼의 지독한 흔들림 끝에 탄생한다. 우리는 그 흔들림을 감상하는 것이다.
새벽 이슬 마시는 매미로 살랬드니 거치른 사바나의 이글이 되란다. 무엇이 왜? 이토록 나를 흔들어 놓는가!
바람이 분다. 별이 풀잎이 구름이 촛불이 그리고 내 영혼이 흔들린다.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내 삶은 순전히 바람 탓이다.
인생, 그것은 흔들리기와 중심잡기의 끝없는 반복이다.
■ 악필(握筆) : 서예가가 중풍이나 수전증으로 손이 떨려 붓을 잡기 힘들 때 떨림을 완화하기 위해붓을 손바닥으로 움켜잡듯 쥐고 써 내려간 글씨.
메스토 칸타빌레(mesto cantabile) : 슬프게 노래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