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오래 알던 사람을 잃고 다시는 만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갈수록 드물어지고.
두 번은 없을 것이 분명한 사랑이 찾아오고.
두 번은 없을 것이라 그 사랑을 감행하고.
살아가는 일을 언제든 그만둘 수 없어지고.
가진 게 없어 두렵다가 지키고 싶은 게 있어 두려워지고.
다른 좋은 일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태어난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나인 것을 원망하지 않고.
혼자서 잘 있고.
둘이서 살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고.
매일 다른 일을 반복하고.
다른 일을 계획하고. 실패하고.
절망하고.
다른 길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것을 받아들이고.
우는 것은 혼자서 하고.
웃는 것은 둘이서 하고.
희망을 갖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모두가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유진목 / 산책과 연애
사랑했잖아
니가 그랬고 내가 그랬잖아
그래서 우리는 하나였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어 했잖아
난 너를 보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
니가 보고 싶어질 때도 좋았어
재미있고 아름다웠고
꼭 붙잡아두고 싶던 시간을 보낸 거 같아
니가 정말 소중했었어
그래서 잘 간직하려고 해
난 너를 보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
니가 보고 싶어질 때도 참 좋았으니까
원태연 / 괜찮아
아주 좋기만 하던 날은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데
한겨울 맨발에 슬리퍼 끌고 나온 나를
낮은 담벼락 위에 앉혀두고 자기 양말을 벗어주던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고 울적한 날 밖에
떠오르질 않는데
그런 일을 행복이라고 느꼈던 내가 비참하다며
울었던 것만 생각나는데
당신이 인천에 두고 간 낡은 책에
물을 엎지른 일로 한참 울었다
막강 / 욕설 문장집 中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
구양숙 / 봄날은 간다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생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황정신 / 생각이 나서
내 잔에 넘쳐 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바로 보이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찬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황경신 / 청춘
우리 잠시만 안고 있자.
이제 영영 사라지니까,
조금만 더 서러워하자.
우리는 스무살에 만났고 스물 아홉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이별했다.
오래 이별했다.
순간 순간 사랑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간도 이별하는 과정이었다.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언제고 다시 돌아 갈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을 것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오래된 연인에게 사랑이 빠지면 너무 잔인해진다.
오로지 익숙함만이 그들의 편에 남는다.
지루한 안식처, 변화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낯설게 몰아치는 외로움과 불안정감, 갑작스러운 부재와 공허함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겪어낼 각오로 너와 헤어져야만 했다.
내 오랜 연인아, 우리 잠시만 안고 있자.
결국 이별이지만 관계를 지켜보려고 노력했던 시간조차 사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오래 이별하느라 고생했다.
우리 조금만 서러워 하자. 금방 다시 행복해보자,
안녕 내 연인, 안녕 내 이십대,
너무 순수해서 아팠던 내 첫 진심,
내 모든 습관, 설렘과 불안, 익숙함과 따뜻함,
갈등과 용기, 내 사계절, 취향과 음식과 여행지, 향기와 촉감,
그날의 모든 공기와 분위기, 내 수없는 감정,
초라함과 온전함과 내 정체성이여,
내 오랜 사랑이여,
내 착한 연인이여, 고마웠어. 조금만 서러워할게
고마웠어
새벽에 깨지말고 잘 자길 바랄게
안녕.
김성아 / k에게
기온이 뚝 떨어졌다. 반소매와 반바지로 밖을 나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외출할 때마다 여벌의 옷을 들고 나와야만 했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만큼 이별은 차가웠고. 낯설었다.
불같이 달아오르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랑의 판도는 이 계절처럼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시린 바람이 분다. 누구 좋자고 이렇게 매서운지.
여전히 밤은 오고. 새벽은 길고. 지구의 체온은 오를 기미가 없다.
너도 더위에 떠밀려서 온 것이었을까.
그렇게 무거운 뜨거움으로 왔다가.
이렇게 가볍게 몸을 돌려세운 것일까.
아직 잘 지내고, 잘 가고 즐거웠단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때마침 켜놓은 텔레비전에선 다시 더위를 알린다. 돌아온단다.
'아직은 아쉽죠.'라는 말과 함께. 그를 말한다.
다시 온단다. 미친듯한 전기세로 전 재산을 허비해도 좋고.
땀으로 범벅될 각오도 했으니 무자비하게 진군했던 더위처럼 너도 다시 오면 좋겠다.
싸늘했던 바람은 네 소중함을 직시하라는 뜻이었으면 좋겠다.
가장 큰 포옹을 만들어 안을 것이다.
뜨끈한 열기로 병원에 실려 가도 너의 따뜻함은 잊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싶다.
이불을 덮지 않고 잠드는 밤의 연속이기를.
여름에 걸맞은 더위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말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가을은 잠깐이라도 견디기 힘들었으니 나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나는 그 잠깐에도 네게 구걸하고 싶었다고. 생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너를 기다린다.
이별의 순간은 순간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더위는 오고 너는 안 올 것을 알지만.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고,
너여서 되는 것들도 있다.
의미는 크게 차이 없다.
이 여름은 네가 아니면 안 된다.
이 더위는 너여서 되는 것이다.
네가 아니면 사랑하지 못하고 너라서 이해할 수 있는.
백가희 / 당신이 빛이라면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줄 수도 없는데.
네가 그린 그림들은 하얀 벽에 달라붙어서 백지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고.
단아한 가방들은 내다 팔기 위해 만든 것들,
우리 방을 공장으로, 너의 손목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들.
그 가방들은 모두 팔렸을까?
나는 몰라, 네 뒤에 서서 얼쩡거리면 나는 너의 서러운,
서러운 뒤통수가 된 것 같았고.
그러니까 나는 몰라, 네가 깔깔대며 크게 웃을 때
나 역시 몸 전체를 세게 흔들 뿐 너랑 내가 웃고 있는 까닭은 몰라.
먹을 수 있는 걸 다 먹고 싶은 너.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오리발 같아 도무지 신용이 안 가는 너는,
나무 위에 올라 큰 소리로 울었지.
네가 만약 신이라면 참지 않고 다 엎어버리겠다고
입술을 쑥 내밀고 노래 부르는 랑아,
너와 나는 여섯 종류로 인간들을 분류했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막 박수치면서,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끼워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나의 자랑 이랑 / 김승일
그 날, 마지막으로 그 애를 꼭 끌어안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입고 있던 티를 벗어
얼굴에 묻고는 한참을 울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사랑했던 사람의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인생에는 간직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이석원 / 마지막 순간
첫댓글 이장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