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 눈사람 자살 사건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그러니까 너는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알았어요.
코맥 매카시, 로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 처럼 고여들어,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싶다는 뜻이다.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내가 이 밤에도 그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죽어도 모를 테지만 난 그걸로 됐다.
죽었다 깨어나도 잊지 못하는 그대라는 사람이
나의 반평생 혹은 그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단 황홀감은
겪어본 사람만 알 테니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사랑이라고 해도 뭐가 문제야.
현실이 무슨 상관이야.
그대의 환영에 입 맞출때,
그 잠깐의 사색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백가희, 당신이 빛이라면
이 멍청아.
빠져나갈 출구를 마련해놓고 하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사랑을 예감하게 되었을 때,
네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상처투성이가 될 각오. 그거면 되는 것이야.
그래, 그런 거였지. 그런 게 적어도 측정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마음이었지.
그렇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내 온 마음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그런 사랑, 난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그래서
밤과 새벽의 사이에서, 여름과 가을의 사이에서,
그리움과 후회의 사이에서.
이따금 당신은 그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다시 사라지곤 했다.
사이의 것들은 불친절해서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당신은 접힐 듯 접히지 않는다.
유난히 꼬리가 긴 사랑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나는 차라리 도마뱀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부턴가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물어뜯은 손톱은 깎은 손톱처럼 반듯하지 못하고,
당신이 뜯겨나간 내 마음 역시 그랬다.
하현, 달의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