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주간신문 ‘샤를리 에브도’가 작년 9월 난민 소년 쿠르디의 죽음을 희화하하는 만평을 게재하고 이를 풍자라 변호했을 때, 또 ‘노(Roh)’라는 사람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머리가 나빠졌다는 내용의 영어 지문이 포함된 시험 문제를 출제한 홍대 모교수가 전직 대통령은 신이 아니니 비판받아도 된다며 자신을 변명했을 때, 또 자신들이 어느 평론가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에게 언어폭력과 인신공격을 자행하는 일부 네티즌들을 보았을 때, 나는 뭔가가 잘못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례들에서 ‘비판’과 ‘풍자’와 ‘조롱’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비판은 어떤 논리에 대해 대항 논리로 반박하는 행위로서 나머지 둘과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풍자와 조롱은 둘 다 웃음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자주 혼동된다.
첫째,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는 오래된 기준 중 하나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강자를 대상으로 할 때에만 풍자다. 그때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폭로하는 숭고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적 권력자와 단순한 유명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자는 대개 유명인이지만, 유명인이 언제나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직업의 성격상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인 사람은 유명인이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가 되진 않는다. 게다가 오늘날의 매체 환경 혹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둘째,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권력자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가 광범위하고 부정적인 대중적 영향을 끼쳤을 때, 그의 그런 ‘선택’과 관련된 사항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 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컨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걸음걸이를 문제 삼는 일은 비판도 풍자도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전한 권력자이고 박근혜 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권력자다. 그러나 누가 그들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모와 성별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그 대상이 아무리 권력자라 해도 그 행위는 비열하다.
셋째, 그 웃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 풍자는 상호 토론을 제안하는 일이며 결국 대상에 영향을 미쳐 무언가를 바로잡기 위한 것일 터다. 그런 목적과 무관한 웃음은 미심쩍은 것이다. 여기서 죽음과 웃음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죽은 자도 풍자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생전 그의 부당한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또 여전히 그의 뜻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토론을 제안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죽음 자체’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웃음은 풍자에 동반되어야 하는 목적과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은 노무현’을 풍자할 수는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을 풍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무슨 학문의 자유가 아니라 언어로 행한 시신 훼손일 뿐이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경우에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타인의 조롱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은 이들이 그에 대한 반발로 타인을 조롱하는 데 몰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평등과 정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점은 엄연하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앞으로 내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내 문장을 누군가를 조롱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면 나는 그 날로 글쓰기를 그만 두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