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천주교는
죽음을 통하여 살고,
버림을 통하여 얻고,
부서짐을 통하여 알곡 되고,
깨어짐을 통하여 쓰임 받고,
포기함을 통하여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만 죽어서도 안 됩니다.
한 번만 죽어서도 안 됩니다.
한 번만 깨어져서도, 한번만 부서져서도 안 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단한 이유는
우리의 고백이 '나는 날마다 사노라'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왜, 열심히 사는데 불쑥 불쑥 혈기가 나나요?
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미움에 시달릴까요?
왜,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짜증이 일어날까요?
왜, 견딜 수 없는 답답함과 절망감으로 우울해질까요?
그것은 내 자아가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덜 깨어져서 그렇습니다.
덜 부서져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부서짐에 소망이 있습니다.
부서지게 하심은 쓰시기 위해서,
깨어지게 하심은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죽으라 하심은 살리시기 위해서,
비참하고 초라하게 하심은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도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제 그만 좀 부수고 때리셔도 되지 않느냐?”고
저항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만하심'의 때는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특별히 대우' 하시고
‘특별하게 사랑하신다' 하시면서
종종 발가벗겨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게 하심은
똑바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걷고,
똑바로 보고,
똑바로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 11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면
최고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멘.
-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 묵상-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