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열사기념관
태항산 연화산자락에 있는 진기로예항일열사공동묘지에는 2004년 4월 세운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1942년 5월 반소탕전에서 팔로군부총참모장 좌권장군과 조선의용군의 지도자인 진광화, 윤세주 열사가 희생된 뒤 그해 10월 변구정부에서 이곳에 진기로예항일열사공동묘지를 설치하고 세 영웅들을 안치한 곳이다.
이 기념관에 발을 들여놓으면 정면으로 짙푸른 바탕에 흰 글바탕의 아리랑 시문이 눈에 들어온다.《아리랑노래소리는 화남에서 화북으로 널리 퍼졌고 우리의 발자취는 중국 각 전장에 남겨있다.》
조선의용군의 전신은 조선의용대이다. 대장 김원봉(1898-1958)은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약산이고 어려서부터 국권을 상실한 조선이 일제의 유린을 받고있는 참상을 목격해왔다. 김원봉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을 큰 뜻을 품고 1916년 중국에 와 선후로 천진 덕화학당과 남경금릉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 후 김원봉은 무장항일의 뜻을 품고 중국동북에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한편 뜻이 맞는 지사들을 규합시켜 11월 9일 길림에서 비밀회의를 열고《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김원봉과 윤세주 등 13명이 의열단을 창단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의열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기반을 무너뜨릴 것에 관한 행동방침을 확정하였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열단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무력항쟁을 주창하였고,《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면서 의열단을 확대하였다. 20세기 20년대 의열단은 선후로 국내외적으로 밀양경찰서폭탄의거, 홍구공원 폭탄의거 등을 비롯한 의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고 동방피압박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1926년 김원봉은 단순한 의열투쟁보다는 대중운동을 이끌고 자체의 군대를 조직해야 함을 깊이 인식하고 의열단 단원들을 이끌고 황포군관학교 4기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는 한편 중국의 반제반봉건투쟁에 참가하였다. 1927년 국공분열후 김원봉은 하룡부대에 입대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상해를 거쳐 북평으로 갔다. 북평에서 그는 공산주의이론가들을 만나 공산주의와 대중운동을 학습하였으며 레닌주의학교를 세우고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이끌었다.
1932년,김원봉은 더욱 많은 혁명자들을 규합하고 중국내 모든 반일지사들을 단합하여 대일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남경으로 와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인 삼민주의력행사 서기인 등걸 등의 도움으로 중국국민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다. 김원봉은 1932년 10월 20일 남경 교외의 탕산 선사묘라는 사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3년 4월까지 김세일(金世日), 윤세주, 이육사 등 제1기생 26명을 졸업시켰다. 김세일과 윤세주는 조선의용군의 주요간부로 항일전장에서 활약하였고 이육사를 비롯한 많은 학원들은 각지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던중 체포되여 희생되었다.
1933년 9월, 학교는 강소성 강녕진에 옮겨 제2기를 운영하였다. 1934년 4월까지 55명의 청년이 졸업하고, 1935년 4월, 김원봉은 남경교외의 상방진 황룡산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를 교육시켰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서 김원봉은 조선청년들을 양성하기에 힘썼다. 학원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면서 엄격한 정치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김원봉은 남경에 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남경에 모인 여러 당파들과의 련대를 강화하고 전민족의 대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1932년 10월에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광복단을 비롯한 단체들이 상해에 모여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고 1935년 7월 4일, 5개 당파단체들을 규합시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1937년 일제가 남경을 공격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본부를 거느리고 남경을 철수하여 무한으로 갔다. 1938년 10월 10일, 그는 무한에서 여러 혁명군사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재규합하여 조선의용대를 창립하였다. 갓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였지만 드디어 무한의 함락을 맞게 되였다. 무한이 함락되자 의용대는 미래 전투방향을 두고 지도사상면의 혼잡을 겪게 되였다.
무한 함락직후 이유민의 인솔하에 허정숙, 이근산, 이달, 김철 등이 무한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연안으로 갔다. 그 뒤를 이어 최창익이 10여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가며 그들은 모두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국민당 각 전구로 흩어져 싸웠다. 대본부는 김원봉의 인솔하에 국민당을 따라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하에 호남성의 제9전구에서, 제2구대는 이익성의 인솔하에 호북성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제3구대는 하남의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부터 1940년사이 국민당 각 전구에 흩어졌던 의용대대원들도 여럿이 뜻을 같이하여 북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각 구대는 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익성이 거느린 제2지대와 부분적인 1지대, 3지대 대원들은 낙양에 모였고 낙양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일부는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본부와 1지대, 3지대 주력이 박효삼과 윤세주의 인솔하에 중경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낙양에 모였다. 김학무, 왕자인, 이익성, 김세광, 이춘암, 양민산, 최채를 비롯해 무려 80여명이 도강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조선의용대는 부분적으로 수차에 나누어 황하를 건넜다. 이들은 화북대지와 중원을 이어주는 길목에 놓인 맹진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들어갔다.
적들과 싸우려는 만강의 정열을 지니고 황하를 건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윤세주가 작사한 《최후의 혈전》을 높이 부르며 팔로군을 찾아 태항산으로 갔던것이다. 태항산에 이른 조선의용대는 화북지대로 되며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다.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화북, 화중, 화남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그들은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에 능통하여 항일홍보활동을 전개하는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용군의 조직력양은 확대되였고 군사와 정치적 소양이 우수한 간부를 배출하였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지도자들은 조선의용군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베풀었고 함께 화북항일근거지를 건설하였다. 공동협력하여 일제를 소멸하고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길에서 조선의용군전사들은 용감히 분전하였고 영원히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