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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1.방언을 쓰면 안되나요?
통합.감리.합동.오순절.침례교등은 쓰거든요
성경에보니 방언에 대해 나오긴하는데 헷갈리네요
질문자님의 질문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에 방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언을 주장하는 분들이
주로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은 다음입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런데 지금 보신 이 성경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분명히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맞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전체적인 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부분만을 보고 이를
크게 부각 시키고 부각 시킨 현실이 되어 버렸는데
그림으로 나타내면 이렇습니다.
한 부분을 부각 시키고 부각 시키다 보니
그림과 같이
방언에 대한 전체적인 부분은 티끌 같이 작아져 버리고
한 부분,
즉 다리가 코끼리 전체 보다 더 커져 버린
방언에 대한 현실입니다.
방언에 대해 말을 하려면
일부분만을 부각 시키고 부각 시켜서 주장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방언을 말하고 있는 전체를 다뤄줘야 합니다.
다음 그림과 같이 성경이 말하는 전체를 말입니다.
이 그림에서와 같이
일부분만을 부각 시켜 주장하다 보니
이를 대하는 많은 성도님들이
그런가 보다 하고 따르게 되고
그와는 반대로 성경전체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어둠에 빠져들게 되고 마는
무서운 현상이 일어나고 맙니다.
방언을 주장하는 측이 주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의 근거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음입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반면에 방언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고린도 전서 12장, 13장, 14장 까지입니다.
이 분량은 방언을 주장하는 측에 비하면
코끼리 전체만큼 분량이 많고 큽니다.
이것에서 말하는 바, 전부 말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부분만을 부각 시키고 부각 시켜 따르게 하고
전체를 티끌로 만들어
성경에서 방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어둠에 빠져들게 하는 현실입니다.
전체에 나타나 있는 방언의 전부를 보게 하셔야 합니다.
더 크게는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기록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셔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고린도 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그 문제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파벌이 생겼고(고전1:11,3:3)
사도 바울이 사도가 맞느냐는 의심이 생겼고(고전3:1-2)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이 생겼고(고전5:1)
교인들 끼리 이방 사람들에게 송사하는 일이 생겼고(고전6:1)
우상제물 음식 먹는 것에 대한 문제가 생기는 (고전8:1)
등등과 함께 온 교회 성도들이
방언하는 상태에 빠져든 문제가 생겼고
이 같은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사건이
사도바울에게 전해졌고 (고전1;11)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 소식과 관련해서
사도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고전16:21)
한 마디로 말해서
고린도 교회는 정상적인 상태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전체가 방언하는 상태에 빠져들었고
그 까닭은 사람의 이성 밖의 신적(영적)현상이
가시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게 나타났었고
그래서 모두가 사모하게 되는 늪에 빠져 들었고
특히 여자들이 더 빠져 들었습니다.
이러함에 대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제동을 겁니다.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이러한 경고의 말씀과 함께
온 교회가 다 방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전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가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방언을 해서는 아니 됨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이 제일 큰 은사로 여기고
다른 은사는 귀히 여기지 않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전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러 지체가 있어서 한 몸을 이루는데
손이 좋다 하여 다 손이면 발이 좋다 하여 다 발이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
방언에 빠져 버린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온 성도들이 다 방언하는 것에
빠져 버렸기에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모든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분간 못하시면
달리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 전부가 방언을 제일로 여기고 사모하였기에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을 첫째는 둘째는 하시면서
여러 은사 중에 꼴찌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리도 전서 13장을 흔히들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전체가 방언을 사모하고
방언하는 것에 빠져 버렸기에
그 보다 더 좋은 은사를 보이겠다하시면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과
방언을 대조하여 말씀하셨는데
12장과 13장의 연결을 보십시오,
방언을 사랑의 은사와 대조하는
13장임을 보게 되지요.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시면서
이어서 13장으로 넘어와서
사도바울이 방언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사랑을 높이는 반면에
속된 말로 방언을 완전 깎아 내려 버립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리고 사랑에 비교하여 사랑은 영원한 것이지만
방언은 때가 되면 끝이 난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방언, 예언, 지식도 부분적인 것이고
온전한 것이 오게 되면
부분 적인 것들이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하여 진다는
이 말씀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울퉁불퉁 하고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있다고 했을 때
농부가 불도저와 삽, 곡괭이 등의 여러 기구들을 동원하여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밭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밭이 온전한 것이고 들판을 온전한 밭으로 만들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사용된 도구,
즉 불도저, 곡괭이 삽 등이듯이
예언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방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들이고
들판이 온전한 밭이 되면 이에 사용 되었던
여러 농기구들의 사용이 끝이 남과 같이
방언도 온전한 것이 오면 끝이 나고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따르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가서 언급하기로 하고 ....
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냐?
사도 바울이 방언하는 고리도 교회에 대해
반문하는 말씀입니다.
거문고나 피리가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파수꾼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가 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냐?
라고 말입니다.
고전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라는 것인지
하지 말라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 할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혀로서 상대방이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허공에 대고 하는 소리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전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고
그 모든 소리에는 뜻이 담겨 있는데
뜻을 모르는 소리를 하게 되면
하는 자도 듣는 자도 야만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14: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서 방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며
만약(가정하여)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되면
통역을 세워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방언으로 말을 한다 하여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함으로
아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깨달은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다음의 말씀으로 방언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이는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는
방언에 대한 이 정의에 이의를 달지 말고
구구한 이설들을 늘어 놓지 말고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방언은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느 누구의 주장이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정의입니다.
방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과 방언은 관계가 없습니다.
믿는자들을 위함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표적이기기에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왜 그런지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앞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도저나 곡괭이, 삽등의 농기구는
울퉁불퉁한 들판을 곡식을 심기 위한 밭이
되기까지 필요한 것이고
들판이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밭이 되었다면
불도저나 곡괭이나 삽등의 농기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 끝이 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말씀하시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예언, 방언, 지식이라는 이러한 부분적인 것들이
폐하여 짐과 같은 뜻입니다.
보십시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여기서 온전한 것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사람에게
방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방언의 역할이었고 방언의 역할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방언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불도저와 곡괭이와 삽으로
들판이 온전한 밭이 되었기에
불도저와 곡괭이와 삽의 역할이 끝이 나듯이
사람이 믿게 되면
방언의 역할은 끝이 나기에
방언은 믿는 사람을 위함이 아니고
믿지 아니한 사람을 위한 표적인 것입니다.
이해되시는지요?
방언이 표적으로 주어진 목적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으리라 보고 ....
그렇다면 표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주어지게 됩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 하였기에
표적을 알아야 합니다.
표적이란 사람의 이성 밖의 초 자연 현상으로서
이를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을 깨고 나와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성령의 역사인데,
표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을 부여 받은 모세가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너희를 출애굽 시킨다고 했으니
너희들 나를 따라 나오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믿겠는가?
라는 것이 모세의 의문이었습니다.
출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때 지팡이를 땅에 던지면 뱀이 되고
디시 손에 잡으면 지팡이게 될 것이라는,
이것이 표적이고
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로서 포조주가 되는 것이나
죽은 나사로가 말씀으로 살아나는 것이나
문둥병자가 말씀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등등,
이 모든 것이 표적들입니다.
이러한 표적들을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행하셨습니다.
그 표적들을 얼마나 많이 행하셨든지
이렇게 기록해 주시고 있습니다.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여러 많은 종류의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방언이 무엇인가?
여러 표적들 중에 하나로서
그 목적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
믿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방언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한 사람을 위하여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역사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을 예수님과 함께 하신
성령께서 행하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음)
요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을 행하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당시 많은 유대 사람들은 표적이 말씀하시는 바,
믿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육신적이라서 병 고침을 바랄 뿐이고
이성 밖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으킴에
따라 다니며 무엇이 될까 해서 이였고
먹을 떡을 바라서 따라 다녔지
표적이 말하시는 바를 따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지 못한 당시이었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방언이 표적이라는 것과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왜 표적을 행하게 하셨는가?
이에 대한 답변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을 말함에
혹자는 말하기를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서 14:2절에 나오는
방언이 다르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4:2절에 나오는 방언은 (γλώσσῃ) 단수입니다.
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
사도행전 2:4절에 나오는 방언은( γλώσσαις)복수입니다.
καὶ ἐπλήσθησαν πάντε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καὶ ἤρξαντο λαλεῖν ἑτέραις γλώσσαις καθὼς τὸ Πνεῦμα ἐδίδου ἀποφθέγγεσθαι αὐτοῖς.
사도들 여럿이 함께 방언을 했기에 복수로서 방언들이고
고린도전서 14:2절은 단수로서 방언이지
다른 방언이 아니고 같은 방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주장하는 분들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서의 방언이 다르다고
주장함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같은 방언임을 아셔야 합니다.
모르거나 틀릴 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적으로 바른 것이 주어질 때우리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는 대단히 중요함으로
방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말씀을 드려 봅니다.
사도들 당시에는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을 당하였고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나그네 유대인들이 되어
세계 각국의 흩어져 모국어를 모르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방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미국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한국으로
흩어져 있다가 1세대가 죽고 2세대가 죽고, 죽고 하여
이후 세대는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모국어를 모르고
한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한국말을 하고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미국말을 하고
일본에 있는 유대인들은 일본말을 하고
중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중국말을 합니다.
이러한 나그네 유대대인들이
오순절이라는 절기가 때면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행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때 이들을 향하여
제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성령을 따라 말한 것이
미국말을 하였고 일본 말을 하였고 중국말을 하였고
한국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국에 흩어져 있다가 유대에 온 나그네 유대인들이
통역 없이도 한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한국말로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미국말로
일본에 있는 유대인들은 일본말로
중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중국말로
자신들이 태어나 있는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되었던 것이고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 사람들도
자극의 언어로 알아듣게 되었고
이것이 방언이고 이것이 표적이고
방언이라는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이 다음입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9 우리는 바대 인과 메대 인과 엘람 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2:11 그레데 인과 아라비아 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언어의 기적 성을 띤 것이 당시 방언이었고
방언이 주어진 그 목적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은 믿는 사람을 위함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인 것입니다.
믿는 자는 이미 믿음이 주어지고 세워졌기에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고
믿음이라는 목적이 온전히 완성 되었기에
믿는 사람에게는 끝이 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고린도 교회에도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신적 능력으로 여긴 고린도 교회가
너도 나도 방언을 사모함에 빠져들어 버렸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이
온 교회가 다 방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시면서 여러 많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고전 14:2,14)
이것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해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 교회에는
그리스 말을 알아듣는 교인분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의 말은 방언임)
그런데 제가 그리스 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Λέγει ὁ μαρτυρῶν ταῦτα Ναί, ἔρχομαι ταχύ. Ἀμήν,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누가 저의 이 말에 아멘 하겠습니까?
이런 방언을 하게 되면
우리 교인들에게
저는 야만인의 짓을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합니다.
허공을 치는 짓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러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를 너도나도 사모했고
빠져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만약에 누가 방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통역을 세우라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방언 기도입니다.
성령에 의한 이방 국가의 언어로 말하는 방언의 역사이었기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기도는 자기의 덕은 세우지만
다른 분들에게(교회) 덕을 세우지 못함을
예언에 비하여 말씀하셨고
방언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려면
동역을 세우라는 것입니다.(고전14:4-5)
제가 그리스 말을 한다면 그렇다면 통역 없이는 하지 말고
혼자만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이방 국가의 언어,
곧 방언으로 누구 보다 많이 구사하였고
방언으로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도 할 때나 혼자 이었을 때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을 세우고
통역이 없을 경우는 혼자만 하고
여러 많은 다중이 있는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4: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외국말(방언)로 기도 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금하지 말라는 말씀도 더불어 하고 있는
고린도서에 나타난 방언에 관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당시 성령의 은사에 의하여
성령을 따라 외국말(방언)로 말씀하시는 바를 따라 전도를 하였고
외국말로 기도를 하였기에
그 자신은 모르지만 영으로 하였던 것으로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입니다.
사도들 그 자신들도 모르는 방언(외국어)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하였기에 그런 현상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당시에 이렇게 방언을 말하게 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믿게 하기 위함이었기에
방언은 믿는 자들의 위한 것이 아니고 ‘
믿지 하니 하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으로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역사 하신 것이지
고린도 교회 처럼 너도 나도 하겠다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덤벼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방언에 대해 전체를 살펴본 바,
한국교회에서 현재 널리 퍼져 있는 방언에 대한 지금의 상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 내용은 방언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는 것이 맞다,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고
성경을 볼 때 일 부분만을 봐서는 아니 되고
성경 전체로 보셔야 한다는 점에서 언급한 바이었기에
맞다 틀리다며 물고 무는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며,
WCC.WEA반대운동연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 모두가
분변(分辨)하여 바른 길을 걷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나 또는 자신의 어떤 경험이나
어느 교단이 추구하는 노선을 따름 보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따름이
절실한 시대가 되었음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모든 분들에게 성령의 분별력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2.18 11:31
첫댓글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쯤 읽다가 그만 두었지만
내용은 아주 좋습니다.
아주 명확한 해석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동안 방언에 대한 주장들을 듣게되어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내용들을 접하게 되어지고.. 이제 정리를 제대로 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