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특별히 고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묵직합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자유함이 있어 마음은 가볍습니다.
또 내일은 주일이니 더욱 즐겁습니다.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을 날마다 정결케 하시고
주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이끄심을 믿사오니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2.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3.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4. 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6.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8.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10.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본문 주해)
1~2절 : 본문의 말씀이 주어진 때는 시드기야 왕 때이다.
바벨론 왕이 고니야(여호야긴 왕)를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삼은 것이다.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왕하24:17)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3~5절 : 애굽의 도움을 요청한 유다를 돕기 위하여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올라온다.
이 소식을 들은 갈대아인들 곧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고 그들을 막기 위하여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다.
시드기야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며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위기상황에 기도해 달라는 모습과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6~10절 : 이에 대해 예레미야가 ‘너희를 돕기 위하여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고 한다.
시드기야 왕이 기대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기도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9절에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시드기야왕과 거짓 선지자들과 또 그들의 말을 따르는 백성들 마음속에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들을 떠나리라’는 마음이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듣고 말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여서 말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10절은 유다의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설령 바벨론 군대에 부상자만 몇 명 남았을지라도 그들에 의해 유다는 패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나의 묵상)
3절에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요청한다.
언뜻 보면 매우 경건한 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2절에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나를 지켜 주세요, 내 자식을 지켜 주세요, 내 사업을 지켜 주세요, 내 나라를 지켜 주세요....’ 하는 꼴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떨어진다.
그것은 ‘네가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계속 생각한다.
“아니야 망하지 않아.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데 망하겠어?”
오늘날 믿는다는 자들도 중얼거린다.
“내가 얼마나 주일을 잘 지키고 주의 일에 열심인데.....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데....”
거기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오늘날 엉터리 목회자들이 긍정과 소망의 말을 쏟으며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평안할 것이라고 거짓을 늘어놓는다.
이 모든 모습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9절)이라고 오늘 말씀하신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세상적으로 자신이 잘 되기를 원한다.
합격, 취직, 결혼, 아이 낳고 승진하고....집도 넓히고....교회당도 멋지게 건축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우리 안에 본성적으로 가득하기에 이렇게 되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자 하는 생각이 바로 스스로 속여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생각하고 듣고 말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속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당신의 안식을 위해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있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러니 택한 백성들의 온 마음은 자기를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의 삶을 주시는 십자가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할 때 바벨론으로 공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하며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나 중얼거리며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상실을 두려워하고, 자기 실패를 두려워하고, 자기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자꾸 스스로 속이면서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더럽고 부패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될 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 세상 것을 향해 달려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알게 되는 것이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더 많이 하게 되는 말은 ‘저는 죄인입니다.’이다.
그리고 이 죄인은 늘 스스로 속이는 말을 잘 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택한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묵상 기도)
주님,
하나님 말씀은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면
그것이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인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속이는 말을 중얼거리는 저를 봅니다.
아, 그때나 지금이나 제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뿐입니다.
이 지독한 죄 덩어리 존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직 생명과 빛이신 말씀에
날마다 저를 비추어 보고
십자가만을 붙들고 나아가니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