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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4장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육체의 행위인 할례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등장시킵니다.
육체의 행위로 얻는 의는 육체의 열심을 동반함으로서 잡혀지고 보여지는 현실성이 있는 반면 <한 의>를 믿는 믿음의 의는 육체의 무익함과 약함에 근거하니 도무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마치 뜬구름 잡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존 인물이였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등장은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의의 선수들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럼에도 막상 이 인물들을 살펴 보면 뜬구름 잡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별따기만큼 불가능한 삶을 살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어떻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으며, 집에서 키운 318명을 데리고 사상초유의 연합군과 싸워 이겼으며, 하늘의 뭇별처럼 네 자손도 그리되리라는 말씀을 믿었으며. 늙은 육체로도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금쪽같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다시 살려내 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사라가 죽은 이후 그 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얻어 아들 6명을 더 낳았을까?
다윗은 어떻해 골리앗을 때려 눕혔으며, 전쟁의 영웅으로 백전백승했으며,간음과 거짓과 살인이란 죄악의 세력에 함몰되지 않고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을까?
바울은 이런 삶의 결과를 낳게 된 원인을 그들의 육체 행위에 두지 않았습니다.육체 행위에 원인을 두지 않았다하여 육체 행위 없이 무위 도식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누구라도 우선 순위를 영(말씀)의 생각에 두고 사노라면 그 말씀 생각을 쫓아 행하려 함에는 반드시 육체의 힘씀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탄생된 교회를 주의 몸/주의 신부/그리스도의 몸으로 명명했던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 생각으로 살아가는 행위는 주의 몸된 교회의 행위이며 주의 신부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행위라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알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은 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갑니다. "의"가 없이는 못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해 들어갔을까요?
이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못들어 가나 하나님께선 능히 하신다는 말씀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말씀에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뭔가 일하셨다는 감을 잡게 만드십니다.
이 때 우린 비로서 율법의 산물인 인과응보에서 그것과는 별도의 세계인 은혜의 세계에 눈이 열려집니다.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하나님의 세계로 쏠리게 됩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자랑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자랑할게 굳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이쁜 사라를 자기 아내라 하면 죽을까봐 자기 목숨 부지 위해 두 왕들에게 성 상납 한 것과 젊은 하갈과 동침하길 기꺼운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정욕을 위해 간음한 뒤 자기 의를 위하여 거짓과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의롭게 여김을 인정 받게된 사연을 성경이 없다면 어찌 풀어낼 것입니까?
바울이 이렇게 성경을 가지고 풀어냄에 있어 답부터 먼저 말했다면 묵상 서론이 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질문으로 던진 "혈통(육신)으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얻은 것이 무엇이뇨?"라는 말에 답을 찾아 가는 길을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감동입니다. 복음엔 언제나 감동이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후손과 땅과 큰 민족일까요? 창대한 이름일까요? 아니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주시고 싶어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을까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분께서 가장 주시고픈 것은 온 천하가 아닌 상실된 영혼을 찾아 주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도 아브라함에게 상실된 영혼을 찾아 주시고 싶어서 주신 것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 "의"를 얻었으니 제일 좋아하신 분은 아브라함 보다 여호와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근데 이 "의"는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믿음"은 "한 톨의 씨앗(한 의=예수 그리스도)"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수고로이 행한 일들 중 가장 큰 일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갈 바를 모른채 고향을 떠난 행위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는 이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그럼 무슨 행위로 의롭다 여기심을 얻었을까요?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니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 내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세어 보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자기를 믿는 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십니다(창15:5~6).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말이 되는 말이지만 인간 아브람에게는 말도 안되는 말을 어찌 믿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테리입니다.허나 이 미스테리는 공공연히 말할 수 있도록 공개된 미스테리입니다.
왜냐면 이런 말씀을 주시기 직전 아브람은 중동지역 최초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카 롯을 비롯한 전쟁 포로들을 구해서 돌아 오는 길에 살렘 왕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준 포도주와 떡을 먹고 마셨으며 그의 축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써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알고자 힘쓰는 자에게 그분은 우리 마음의 무지와 어둠을 비치기 위해 새벽빛처럼 날마다 성실히 임하십니다.비처럼, 땅을 적시는 늦은 비처럼 우리 심령을 적시며 임하십니다(호6:3)
아브람이 지극히 높으신 전능자의 제사장이며 평화의 왕이 주는 그 떡,그 포도주,그 분 축복을 받았다 함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과 그 축복을 받는 그의 사람으로 되어 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싸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이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겨주십니다.
이 말을 오늘날의 버전으로 말하자면 율법 종교에 얽메어 율법의 열심으로 매 번 제사와 제물을 드린 육체 행위로 의롭게 되는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해주었노라는 십자가 복음을 믿을 때 비로서 이것을 의로 여겨주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배 모임을 폐하면 복음이 아닙니다.복음의 예수 피는 율법의 짐승 피와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날마다 모여서 순전한 떡을 나누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임이 얼마나 복음에 절절하게 만드는지 아는 자들은 모임을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완전 육체의 원인 없는 결과로 의를 창출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무 일도 안했는데 결과(삯)으로 받은 것이 의입니다. 만일 육체로 613가지나 되는 모든 율법을 지켰으므로 의롭다는 삯을 받았다면 이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보수입니다. 그리고 알마든지 육체가 수고한 일들을 자랑할만합니다.
허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간들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방법으로 육체의 무익함을 드러내십니다.
왜냐면 아담이 범죄함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전가된 죄가 모든 육체들에게 있는 한 그 어떠한 선한 행위로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이 선한 율법을 다 지켰다 하여 죄로부터 구원 받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죽하면 다윗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기록으로 남겼을까요?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아멘!
아멘!
아멘!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면 할례는 의와 상관없는 육체 행위라는 말입니다. 역으로 할례를 받은 다윗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란 불법이 사함 받아 죄가 가리어지는 것으로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가장 큰 복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도 아니고 할례를 행해서 받는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만듭니다.
완전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야말로 일한 것 없이 받는 은혜로 죄사함의 은혜를 말합니다.
할례 받고도 극악한 죄를 지어 돌 맞아 죽어야 할 다윗이 율법의 행위로 수 천 수 만의 제물로 드리는 희생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죄를 없이 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을 때 그는 시편32편을 성령의 감동 속에 기록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자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8: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아멘!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는 99세로 여호와께서 이미 그를 의롭다고 여긴지 오랜 후 였습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어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라 내가 너를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되리라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지키라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13: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 할례를 명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던 믿음의 씨톨 하나가 세상에 출현하기 직전(아브라함 99세)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할례는 언약 자체가 아니고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이라함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과 창대한 나라(민족)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함이 여호와와의 언약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언약의 표징이란 말입니다. 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할례를 자식을 생산하는 생식기에 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이 "씨"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민족과 언약의 땅 가나안도 언약했지만 언약의 머리는 "씨"로서 그것들은 "씨"로 인해 덤으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할례란 이 씨(그리스도/말씀/영생)의 언저리나 겉둘레에서 맴돌다 인생을 끝낼 것이 아니라 이 씨와 직접 관계하며 영원히 살 것을 요구하는 표징인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씨인 말씀을 심령에 영접하여 마음의 심지로 뿌리 내리라는 것입니다
언저리,겉둘레라 함은 좁게는 이 씨의 그림자에 속한 유대교로서의 율법 제도와 제사와 절기나 할례나 음식법이나 정결례 등을 의미합니다. 넓게는 모든 종교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실상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일뿐입니다. 그 몽학선생을 주로 붙잡고 사는 인생은 여전히 천상의 그림자요 모형인 이 땅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나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요,왕을 모시고 사는 이 집이 왕궁인 것입니다. 이 양상은 지상에서 시공을 초월한 하늘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현상인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7~18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