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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on the seaven day) 하신 일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2장 3절을 거듭 거듭 읽다 보니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더니"가 곧 "그가 하시던 일"이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모세가 광야 성막을 다 지었지만 아직 성소의 역활을 하기엔 한 가지 일이 더 남았는데 그것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거룩케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여호와께서 보이신 식양대로 다 완성했을지라도 성령을 예표하는 관유를 바르지 않는 한 거룩한 일을 하는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도 제사장으로 택함 받았을지라도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는 성소 업무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예표하는 관유와 기름을 바르고 부음으로서 거룩케 하는 일을 마칠 때 비로서 성전 양식대로 만들기 시작한 그 모든 일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들려주시며 깨닫게 하사 땅을 딛고 사는 내 삶속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적용케 하십니다. 이로서 광야 교회가 이동식 교회가 된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걸어다니는 성령의 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말씀하시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산상팔복을 말씀해 주시며 제자들과 삼년 반 동안 함께 하십니다. 이는 복이 곧 당신으로, 당신이 함께 함이 복임을 알리려 하심입니다.
때가 이르러 당신의 종말,곧 죽음이 임박해 온 것을 아시고 다락방에서 여러 말씀을 주실 때 너희는 내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고 하시나 막상 제자들이 실제로 말씀을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아버지께로 가셔서 각자의 머리위로 임하게 하신 성령님으로 인해서 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과 우리들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나 실상은 "태초에(베레쉬트)"를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한 자가 되어 만물을 발 아래 두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흘려 보내는 통로요,복이 되어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운반자로 살아갑니다.
이는 더이상 자기 일을 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일,즉 사나 죽으나 먹고 마시나 무엇에든지 의와 화평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적인 율법(죄와 사망의 법)의 굴레가 벗겨지고 가볍고 쉬운 복음(생명과 성령의 법)의 날개,곧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날마다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배워 알아가는 삶을 사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이를 "쉼"이라 하셨고 또한 "영생"이라 하셨습니다.영생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유한한 계절과 날들과 년수의 시간 싸이클을 벗고 영원한 오늘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생의 정의는 "유일하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를 아는 삶"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요5:24
이것은 주술과 마술적인 체면 상태속에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실제로 지식과 인격의 귀로 듣는 자들이 경험하게 된 것을 예수님께서 다시 또 들려 주시는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실제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신을 발견한 결과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다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 품에 안긴 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산 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가?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가?는 내가 진실로 십자가(하나님께서 주신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아닌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여러 시험 환난 시련들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감사와 찬송으로 통과한 자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구비된 자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서 자신을 십자가의 주와 함께 못박고 주와 함께 장사 지내고 주와 함께 다시 사는 삶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기름부으심이 내면에 채워진 자입니다.
바울은 이 현상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져 똑바로 서있게 된 속사람의 실존 즉 속사람의 영생으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였을 때를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땅이라고 일컫습니다.그럼에도 하나님의 신이 품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 그 은혜를 알 수 있도록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서 우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생각)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셀 수 없이 많은 생각(영광/말씀/뜻)들을 많은 가시로 푹푹 찔러 그를 참혹한 고통가운데 빠뜨렸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18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나님의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8:4~9
창세기 1장 3절의 그 빛이 무저갱 같은 우리을 비추이는 순간부터 아버지께서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곧 빛과 어둠을 나누며 아래 물(비진리)과 위물 (진리)를 나누며 삼라만상 온갖 이름들과 그 생김새와 특성들을 통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아갑니다.
허나 여전히 내 속엔 아버지께서 쉴만한 곳이 없을정도로 내가 너무 많습니다. 이걸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일곱째날을 정하사 그 날이 오면 작정하신 복을 주시는데 바로 이 복이 종말의 복입니다.
이 종말의 복을 받은 자는 당연히 종말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종말의 복이란 우리를 지금껏 거룩하게 하시려고 새창조의 온갖 일들을 행하시던 일을 완전히 종결 짓는 거룩성을 부여하시는 일로 온전히 거룩케 하사 태초의 그 빛,곧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귀속시키는 복입니다.
계시록은 이것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과 혼인한 어린 양의 아내를 말합니다(계21:9~10).
우리들 각자가 제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구레네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간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가장 사랑해 오던 주님을 바로 내가 죽였다는 통증이 오는데 이건 평생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갈보리 십자가의 스티그마로 남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한 흔적은 독자를 잃어버린 지독한 참회가 뼈와 살에 새겨진 것을 뜻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위한 숱한 고난일 수도 있겠지만 원천적인 흔적은 내가 예수를 죽인 흔적이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도 이 예수 죽인 흔적이 없는 바탕에서 한 것이라면 "Nothing"에 속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절절이 사랑한 주를 내가 죽였다는 통렬한 통곡을 아직도 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내 몸밖에서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가 나로 인해 죽으면 내 가슴이 바로 그의 무덤이 됩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그 사랑 잃은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그 유일한 사랑이 다시 찾아 오는 것입니다. 내 가슴에 묻었기에 남의 가슴이 아닌 내 가슴의 무덤을 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신 부활의 주를 뵙는 날이 곧 일곱째 날에(on the seaven day) 아버지께서 날 위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그 모든 일들을 마치신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부활하사 안식을 누리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안식을 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당신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구원(천지창조)의 수순대로 행하시던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헬 <후스테레오>)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이 바로 안식의 원형인 일곱째날의 안식을 뜻하며 우리는 안식의 주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된 교회의 지체들을 말합니다.
헬라어 "후스테레오'는 '늦게 되다', '열등하다', '부족하다'는 뜻으로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하루가 늦게 되다'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이 말의 역사적인 근거가 민수기 14장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가나안 땅으로 자기 백성을 친히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수없이 약속하신 연고로 가나안 땅을 언약의 땅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열 사람의 정탐꾼들의 말을 여호와의 언약보다 더 믿었습니다.
이에 옷을 찢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니라고 그 땅은 실로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이라며 여호와를 거역치 말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나타나시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민14:11~38).
이 때에 하신 말씀 중에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갈렙과 여호수아외에는 이 십세 이상으로 계수된 모든 자가 진멸 될 것과 그 땅을 정탐한 사 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불신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고 하십니다.(민14:25,29,34)
모세가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고하자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며 아침 일찍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여호와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라며 우리가 범죄하였노라며 가나안 땅으로 올라 가겠다고 아룁니다. 모세는 이 날에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아는고로 그들을 말리지만 끝까지 올라갔다가 아말렉인과 산간 지대 가나인들이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게 됩니다.
'후스테레오'를 읽고 들으며 유대 기독교인들은 단 하루가 늦어짐으로 약속하신 안식과 기업의 땅(신12:9)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된 출애굽 1세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냥 하루 전에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들었더라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을거라는 생각은 그들로 영적 긴장감을 갖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만큼 불신하게 되고 불신하는만큼 교회도 자신들의 생각과 뜻과 의지로 살아갑니다. 이 상태는 아직 여섯째날에 머물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유한한 시간의 굴레에 마음과 생각도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되신 예수님과의 사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나를 훤히 아는 것처럼 고 나도 예수님을 알아가는 생명(말씀)의 자리로 옮겨져 영생(그리스도)을 살아가는 일곱째날에(안식) 이르도록 힘씁니다
때문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4:7)하시며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히4:10)고 하십니다
참고로 일곱째날에 그가 '하시던 일'의 원어는 '메라카'로 '말라크(멧신저/사자/천사의일/좋은소식을전하는자)'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