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편(다윗의 시: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5: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시편에서 말하는 복있는 자들은 일관성 있게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입니다
간혹 나는 실컷 내가 하고픈 말, 내가 터트리고 싶은 감정을 다 쏟은 후에야
<오호라! 내가 여호와께 제일 먼저 달려가야 했는데,이런 원수 사단이 손뼉치며 박장대소 했겠네>라며 뒤늦게 깨닫습니다
허나 "의인은 일 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의뢰하여 깨닫는 즉시 은혜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 보좌로 달려갑니다
변명 아닌 사실 그대로 여차여차 고한 후 사죄의 은총을 구합니다.
천만번 넘어져도 천만번 사죄의 은총을 요청함은 주의 인자하심이 내 욕되고 약하고 썩어질 육체의 생명보다
훨 낫다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믿는만큼 주를 크게 의뢰하는 자의 특징은 그 간구함에 성령님의 연합이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고 그 누구도 대적하거나 맞설 수 없는 주의 이름에는
제한 없이 흐르는 보혈의 강과 생수의 강과 성령이신 불의 강과 성령이신 기름이 흘러 넘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은 구원을 선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록 뜀뛰는 기쁨이 있고 다시한번
전능자의 그늘 아래 피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우리들의 연약해진 두 발목을 단단이 조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편 91편:13
우리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단을 영원한 패배자로 만드셨으니 그것들은 아무리 기세등등해봤자 실패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낙심과 절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승리의 디엔에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 따라간다는게
거짓이거나 상상력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이 자신에게 기름 부으신 여호와만을 믿고 따라가는 길이 비단 길이 아니였듯이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요구하는 바는 돈도 성공도 건강도 명예도 아닌 오직 한가지 온전한 믿음입니다
다윗의 심령 속에서 그로하여금 더 높이 더 넓게 상승 확장되도록 역사하신 원동력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그 결과 그가 가진 믿음의 회복과 탄성 지수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렇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그리스도)"를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않으며
거꾸로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으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8~10
바울이 기록한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질그릇인 그에게 담겨진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에게 믿음의 탄성 지수를 높혀주셨다는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 몸에 자기가 죽인 예수 시체를 짊어짐에 담대했습니다
왜냐면 그가 다시 부활생명으로 나타날 때 자기 몸도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밧세바 사건 이후 자신이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을 사는 내내 짊어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나 다윗이나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는 것을 어찌 그 몸에서 지워낼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오래전 바울과 함께 했던 우리와 동일한 짊어짐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예수 죽인 것만이 아니라 예수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같이 죽였음에도 예수 죽인 것에
전혀 무감각한 문둥이들의 죄까지 우리 몸에 항상 짊어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 부활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듯이 그들 몸에도 나타나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된바 내가 믿은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
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을 아노라>>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 12~15
믿음의 탄성 지수의 높음은 우겨싸임이나 답답함이나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것들에게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성령님께서 빚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맡기되 온전히 맡기게 만듭니다
기록되길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씀 그대로 주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면 모든 상황으로부터 초월적인 자유와 평강을 주십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그가 나를 후대하심이라"
죽음 앞에 서면 생명이 얼마나 무력한지 인식하게 됩니다. 생명보다 더 귀하고 강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죽음 앞에 서니 그 귀한 생명도 속수무책입니다. 이 때 비로서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철저히 인식하게 됩니다
라마나욧으로 피신한 다윗을 찾아 온 요나단에게 "사망과 나 사이에는 한 걸음뿐이라(삼상20:3)"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이 산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편)"고 선포할만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사망과 자신 사이에는 한 걸음 뿐인 절대절명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면서
비로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얼마나 극진히 후대(대접)해 주시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후대하시는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선포합니다
하다면 우린 어떨까? 묵상해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생명을 다시 살리시려도 가장 살지고 기름진 당신 아들을 잡아서 먹이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자들일수록 자기를 극진히 후대해 주신 여호와를 찬송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몇년 전인지 모르지만 에스겔 묵상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왕이신 나의 주께서 한낮 미천한 백성일뿐인
나에게까지 왕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믿게 될 때였습니다
내 왕의 생명은 진리이고 자유이고 길이고 존귀이고 평강이고 정복이고 통치이고 충만이고 지혜이고 부요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런 왕의 생명요소들을 대단히 작은 나에게도 주셨다는걸 믿도록 하시기 위해
날마다 새벽빛처럼 성실하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열심과 인자하심에 어찌 아니
무릎 끓고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
마타나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예수생명으로 우리를 대체하실 만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