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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6장
"19: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만은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을 섬기라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20: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삼상25:24b)"라고 말했던 아비가일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경청했던 다윗이 이제 사울 왕께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정중히 부탁드립니다.진리의 생수와 사귐을 갖는 성도는 현장속에 들리는 레마의 말씀을 지체들에게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됩니다.
이 때 진펄과 개펄 외에는 되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에스겔47:11). 진펄과 개펄은 썰물과 밀물이 오가며 육지로부터 흙탕물을 몰고 오갈 때 가라앉은 흙이 쌓인 곳으로 물빠짐이 순조롭지 않아 물이 마르면 단단해져 소금땅이 됩니다. 물빠짐이 안되니 염분이 빠져나가지 못해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늪,수렁이라고도 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자기 생명을 추격하는 요인이 여호와의 충동(뜻)인가? 간신같은 사람들의 충동인가? 분별하라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면 당연히 여호와께서 왕노릇하시도록 여호와(말씀)의 충동에 따를 것이지만 사람(정과욕)의 충동을 따르면 저주받을거라 합니다
만일 여호와이시면 자기도 원없이 여호와의 제물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실로 청춘 다윗 다운 신앙입니다.허나 다윗은 밧세바 이후 자신이 제물 되기에 얼마나 부적합한 자인지 절감합니다.모태 죄성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허겁지겁 어찌할 바 모르며 상한 심령으로 애통한 자,가난한 자가 되어 울부짖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무흠무오한 여호와의 제물될 자격증 소유자는 없습니다. 이걸 알면 알수록 자기 의는 죽고 예수의 의만 높히는 자가 됩니다.
여호와가 아니라면 충동시킨 자들과 함께 왕까지도 저주 받을거라 합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일은 자기를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과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이방 땅에 가서 다른 신을 섬기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제발 이곳으로부터 자기가 먼 이방 땅에서 헤메다 피를 흘리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어찌하여 메추라기를 광야가 아닌 산에서 찾는 어리석은 자 같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한 벼룩을 쫓는지 종의 말을 듣고 잘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21: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자신이 대단히 잘못된 것을 알아 범죄했다합니다. 또한 사울은 자기를 지켜주어야 할 아브넬외 삼천명 용사들이 잠든 것에 충격을 느꼈나봅니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고 말한 것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다시 궁으로 와서 예전처럼 자기 명예와 생명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감동이 과연 기득권세력이 판치는 왕궁에서 뿌리 내려 열매를 맺을 수 있을런지 답답할 뿐입니다
"22:다윗이 대답하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23 :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24 :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왕의 부름에 선듯 응하지 못한 다윗은 대신 '왕은 창을 보소서!'라는 말과 함께 소년을 보내어 가져 가라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세 번이나 던졌던 창이 다윗 손에 있는 것을 본 순간 사울이 느꼈을 불편한 진실을 생각해봅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아무 죄도 없는 소년을 죽이려 했는지,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다 죽기를 바래서 한 말인데도 지체없이 블레셋 사람 포피 200백개로 사위가 된 용감한 용사를 왜 이리 괴롭히는 자가 된 것인지 마음이 아파옵니다.
왕이 무엇인지,원치도 않은 왕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훨 자유롭건만 왜 이리 못나게 미기적거리며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 착찹해져옵니다.
"25 :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 삼상26
사울이 자신의 범죄를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에게 복을 빌며 큰 일 할 것과 그의 승리를 인정합니다.그럼에도 다윗은 자기 길로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둘의 온전한 연합을 훼방하는 것일까요?
두 번씩이나 왕의 생명을 쥐락 펴락했던 다윗의 눈에 비친 사울은 그도 구원 받아야 할 늙고 불쌍한 죄인일 뿐입니다. 어느새 사울 왕을 중심으로 구축된 사울의 몸통은 나라의 요직자리를 꿰차고 정치와 권세의 맛에 취해 있습니다.그들에겐 인맥과 지역세력과 밭과 포도원과 종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내려 놓고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고충이야 어떠하든 사울 정권이 오래가길 바라는 자들일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그런 왕을 두 번씩이나 살려 준 자신 사이에 계신 것을 믿을뿐입니다. 때때로 선한 싸움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허나 계란과 바위 사이에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믿으면 주저 앉았다가도 벌떡 일어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정신차리게 됩니다
삼상27장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리라 7: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힐 거라며 육백명 용사와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망명을 결정합니다. 다윗이 참 많이 컸나 봅니다.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망명 요청을 허락한 걸 보면 그렇습니다. 다윗 일행이 자기 세력과 영토 확장을 위한 용병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만큼 조직력과 전술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블레셋 망명이 하나님 뜻인가? 아닌가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마치 내 일처럼 고민하는건 우리를 기름 부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기에 각자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 생각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아브라함과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신 여호와께서 또한 아비가일을 통해 나발에게 복수하려는 다윗도 막으신 것을 인정합니다. 하다면 왜 다윗의 블레셋 망명은 막지 않으셨을까?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은 아니지만 허용하시는 것도 있다 한다면 다윗의 블레셋 망명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부모가 되고 보니 다 큰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 큰 자식이 알아서 잘살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다윗이 사울 밑에선 더 배울게 없어서 이방 땅으로 보내시는 것일까요? 무엇을 배우게 하실려고 그리하셨을까요?
다윗이 두 아내와 가정을 이루니 임신 중인 부인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어쩜 갓 태어난 아기도 있었을 겁니다. 육백명 용사들가운데 다윗보다 먼저 가정을 이룬 이들도 있으니 여인들이 만삭에도 무거운 몸을 끌고 피신 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식구들을 어찌 먹여 살려야 좋을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하여 전능자의 기적으로 고난이나 시련이나 훈련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심에도 가장 낮은 곳에 종의 마음으로 오셔서 모든 이생의 고통을 오직 아버지 사랑과 이웃 사랑의 힘으로 능히 승리하신 나사렛 예수를 배워 나가는 길입니다.
여호와의 막으심이 없으니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가서 지방 성읍 하나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기스 왕의 도시에 함께 살면 여호와 섬김도 불편할 것이고 자기 식솔들이 블레셋 주민과의 마찰이나 휩쓸림속에 이스라엘 정체성이 상실될 것이며 아기스 왕의 정치권 영향력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게 좋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기스 왕이 흔쾌히 시글락을 주는데 본디 이 땅은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에게 준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빼앗긴 땅을 다윗 공동체가 다시 찾은 격입니다. 내 생각 밖에서 일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사울과 그 몸통들이 더 이상 다윗을 찾지 않습니다. 다윗 공동체의 시글락 거주는 16개월로 마감합니다. 16개월 후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두 번째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8: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아기스가 이르되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으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1: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다윗이 후일에 사울에게 잡혀 죽임 당하리라는 생각을 기도로 토설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면 아비가일이 들려준 여호와와 함께 자기 생명이 생명싸개에 싸여 보호 받고 있다는 말씀 위에 다시 또 굳게 설 수 있었을까요? 생각은 생각을 낳지만 생각을 기도로 여호와께 아뢰며 토설하면 마음과 시야를 가리던 생각이 사라지고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은 전리품을 아기스 왕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한 것 같습니다. 땅 사용료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그 많은 식구들이 먹고 삽니다. 문제는 아기스 왕의 적이 아닌 이스라엘의 적인 그슬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쳐서 전리품을 갖다 바치면서 블레셋의 적인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 생각에 솔직히 말하면 아기스 왕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중 인격으로 산다는 것에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여호와 왕을 섬길 때의 기쁨은 사라지고 거짓으로 블레셋 아기스 왕을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괴롭습니다.
다윗의 시글락 16개월 동안 찬양이나 기도문 하나 남긴 글이 없다 합니다. 찬양도 기도도 내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감동시키지 않으면 하늘에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의 넋두리요 가락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어쩜 끄적거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열납이 되지 않는 갑갑함에 완성시키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의 성신을 거두어 간듯 메마르고 팍팍한 하루 하루를 산 것 같습니다. 밥도 먹고 잠도 자는데 무미건조한 삶. 성령충만한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이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합니다. 가슴샘과 눈물샘이 막힌 상태. 불쌍한 사람들을 봐도 무덤덤한 마음. 끔찍한 죄악 세상을 봐도 애통하지 않는 마음.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회개할 때 쓴 시편 51편에 보면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주의 성령이 계시지 않음으로 감사와 행복의 촉촉한 이슬이 사라진 영혼의 무미건조함을 체험한 자만이 절절히 구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