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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간:울타리 치다,보호하다)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야셈/put)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하아다마/the ground )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1:11~12절에서는 땅(하아레츠/the earth)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말씀대로 땅(하아레츠)이 주체가 되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지만 창2:9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그 땅(하아다마/the ground)에 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신 땅과 하아담을 만드실 때 쓴 땅은 똑같습니다(안개에 적셔진 땅으로 히브리어로 하아다마).
나아가 하아담은 그 땅으로부터 흙(먼지,가루,티끌,재)을 취하셔서 만드셨다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다만 하아다마에서 나게 하신 것입니다.
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파르는 가루 재 티끌로서 이는 제의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번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다 태우고 나면 재만 남는데 이를 두고 여호와께서는 기쁘게 흠향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사 중에 곡물을 짓이겨 곱게 빻은 가루로 드리는 소제가 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 고운가루마저 기름을 붓고 유황을 취하여 제단 위에서 불사르라고 명하십니다. 고운가루가 타면서 낸 연기외 아무 것도없을까요? 성도라면 이를 통해 산제사/산제물이 무엇인지 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뻐 흠향하시는 산제사는 여호와의 불에 의해 예배자가 다 태어져 더이상 나로 나를 태울 것이 없는 재가 될 때 비로서 Nothing인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며 듣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아담을 빚을 때 그 땅에서 취한 흙(먼지,가루,티끌,재)이 제의적인 용어로 쓰여졌다는 것을 아는만큼 예배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열릴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 인간과의 만남의 토대를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타락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으니 타락의 원인이 그분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창세 전부터 유일한 아들을 인간들을 위해 제물로 줄 것을 준비하신 그분의 인애와 공의와 정직에 대해서 많은 날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아 가노라면 안개에 적셔진 땅에서 취한 흙이 비유하는 바 혼과 육이 단단이 결속된 하아담에게 일방적으로 침노해 들어가신 여호와의 생기 자체가 영원한 사랑의 숨결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여호와의 사랑의 숨결이 육신적인 인간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먼저 자신의 자유를 먼저 제한 하셨다는 것을, 그것도 완벽하게 제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실로 전능자이십니다. 이를 알면 또한 육적 인간 안에 갇힌 상태이심에도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활동하셨는지도 조금씩 알아 갈 것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과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하게 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
여기서 결박과 줄에 메어 갇히고 압제 당하고 주리고 목마른 인간들 속에서 태초에 육신적인 존재와 생명 관계를 맺을 목적으로 침노해 들어 오신 여호와의 생기,곧 그 사랑의 숨결이 느껴진다면 혼돈 공허 흑암에 빛이 있으라 하신 엘로힘을 볼 것입니다.
따라서 그 천지창조의 말씀들과 함께 창조의 일곱 날,곧 자기 일을 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욤:낮)에 하시던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거룩케 하사 복주신 그 거룩한 복,곧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저녁과 아침이 되는 자연적인 시간 싸이클 안에서도 초월적인 일곱째 날(욤:낮)을 살기에 항상 낮과 같이 단정하며 항상 낮이기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들으며 일할 것입니다.
왜냐면 하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물댄 동산)으로 인도하신 여호와께서 곧 선한 목자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자가 낳은게 있습니다. 곧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죽으심으로 낳은 교회입니다.교회는 그의 후손으로 이 교회들이 오래 황폐한 곳과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실낙원인 곳에 창조의 기초이며 완성인 천지창조의 말씀들을 쌓을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들과 일할 수 있도록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창조의 말씀을 쌓을 곳이 없도록 쌓을 것입니다. 하아담을 만드신 여호와의 영광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충만하도록 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는 것을 성취하십니다. 여기서 너는 그의 몸을 낳은 곧 교회를 낳아 주신 그리스도 예수시니 무릇 그를 머리로 삼고 그와 단단히 결속된 짝(교회)은 그가 하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수축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짝은 길이신 그분을 거할 곳으로,곧 성전으로 삼고 영구히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단순히 육만이 아닌 육과 혼이 결속된 육신적인 존재이면서도 생명(영)의 존재로 만들어진 하아담에게서 육(혼)과 영의 갈등을 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함께 선 것을 본 순간 아하 그랬구나라며 깨달아져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과 받는 자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아담을 완성태가 아닌 발전태로 만들었다고 하면 반기를 들까요? 그러면 말을 좀 부드럽게 돌려서 그분께선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시되 기계가 아닌 자유로운 인격체로 만드셨다고 하면 저항없이 끄덕일까요?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여호와께서 저로하여금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자유의 영광을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다면 하아담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또한 자유를 행사할 때 무엇을 근거로 행사해야 안전한 것일까요? 자유에 따른 책임은 어디까지인가요? 등등.. 어디 이런 질문이 자유에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마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한답을 창세 전에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먼저 생명되신 여호와께 구하라는 말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선악간에 아는 자로 그치는게 아니라 분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모든 것이 옳다 하여 옳은 말만 따박 따박 말하는 것이 가하다(옳지)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면 나는 죽고 살려주는 영(말)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을까? 구하는 자가 가한 자인 것입니다. 구했으면 응답을 주시려고 오는 사건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또한 그 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을까요? 분별의 영이 성급한 자에게 임할 것 같습니까? 매사에 선악을 안다고 모세 자리에 앉은 자를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이 전달될려면 엄청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작은 딸이 임신 해산을 거쳐 젖먹이는 양육자가 되니 나처럼 머리가 빠져 앗쌀하게 삭발을 한지 며칠 되었는데 육신의 생명을 낳아 키우는 사랑도 이리 값을 메길 수 없다면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의 생명을 다시 낳는 일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아담을 만드신 분께서 그를 위하여 동방(케뎀:시간으로는 태초에,장소로는 앞에)에 큰 기쁨이란 뜻인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사 거기에 두십니다(put).또한 그를 위하여 하아다마에 친히 나무를 나게 하사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게 하십니다.
왜 나무를 가운데에 있다 하셨을까? 가운데라 함은 중심을 잡는 구심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의 구심점을 생명나무에 둘 것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둘 것인가? 생각/갈등하게 만드는 갈등체로서의 나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나무는 영적 갈망과 혼적 갈망의 표상으로서 내 마음의 한가운데 있다고 보아도 무방 할 것입니다.
아버지!
이 질그릇 안에 당신의 숨을 두셔서 감사합니다.이 질그릇에 보배를 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스스로 계신 당신의 생기와 나는 나다라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과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화인 말씀들을 심비에 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부활이다.나는 길이다.나는 생명이다.나는 선한 목자다.나는 양의문이다.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 그대로 내 안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리 말씀드리게 하시니 진실로 옳고 옳아 아멘!아멘입니다.
아버지!
모든 말씀이 당신에게서 나와서 내 속 깊이까지 침노하여 들어 오사 내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시나이다. 감사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5:1~4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 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 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마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