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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첼라)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야쳄) 중의 뼈(야쳄)요 살(바사르)중의 살(바사르)이라 이것을 남자(잇시)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잇샤)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장
어떤 글에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기에 남자에게 속한 부분이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매우 삼가게 됨은 묵상을 날려보내지 않으려고 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갈빗대 하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 선재하지 않는 한 취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그 사람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그 사람의 목숨보다 더 고귀한 것이 있음을 성령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 모든 교회에게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기록되길 그 사람의 갈빗대(첼라) 하나를 취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선 그 빈 자리를 살(바사르:복음)로 채우십니다(사가르:닫다,잠그다,가두어 두다).
이로보건대 사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살 (바사르:복음,기쁜소식,하나님 사랑,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진리,영생,하나님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면 깊은 잠이 상징하는 바 죽음이란 댓가 지불을 요구할까요? 그야말로 주의 인자가 내 생명(목숨)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로 찬양할 수 밖에 없음(시63:3)은 복음의 내용이 길이요,진리요,부활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 성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요나 자신이 불순종의 댓가인 죽음을 지불했고 부활의 복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복음이 목숨보다 더 중한 진리이기에 수많은 종들이 이 진리를 증거하다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하아담(그 사람)의 옆구리를 살로 채우셨다(히:사가르)는 말씀을 묵상해 보면 왜 주님을 잠긴 동산, 봉한 샘이라고 아가서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는 원어 '사가르'를 통한 멧세지가 '닫다','가두어 두다','잠그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여호와 하나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뺀 그 자리에 살(바사르)을 채운 후 단단히 닫고,잠가둔 그 사람의 옆구리(허리)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를 나오게 하신 역사를 인정합니다.
종내는 유다 왕 다윗의 족보,즉 아브라함의 옆구리(허리)에서 언약의 씨(제라), 곧 마지막 아담을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숨지신 그의 옆구리(허리)를 창으로 찔러 쏟아내게 하신 물과 피를 사도 요한을 통해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로 승천하신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사 물과 피와 성령으로 탄생시킨 주님의 몸된 신부(교회)로 부르사 그 분의 새 창조 역사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 사람이 깊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자기 앞에 서있는 한 사람을 보자마자 "이는 내 뼈에서 나온 뼈요,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알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사람의 옆구리(허리)에 채워진 살(바사르:복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깐 오늘날도 복음이란 은혜와 진리되신 그리스도로 채워진 자들은 서로 알아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는 바울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한 어머니의 자궁,곧 이 땅의 유대교로서의 예루살렘이 아닌 오직 생명과 진리되신 아버지께서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태어난 한 형제,한 식구라는 걸 알아 봅니다.
바울이 이 위로부터 내려 온 약속의 씨를 받은 사라를 자유자로,우리의 어머니라고 자신있게 기록한 것은 율법을 완성시킨 은혜와 진리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족보로 자유자의 족보요 진리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기독교는 이 땅에 형성된 모든 종교 저 너머 지극히 높은 하늘과 이 낮고 낮은 땅을 아우르는 진리로 자유인를 낳는 생명의 자궁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계집종 하갈이 아무리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다 해도 언약(진리의 씨)없이 육체의 열심으로 낳았기에 아들도 종이요 어미도 종이라 합니다.
허나 사라는 비록 늙어 도무지 임신이 불가능한 할미일지라도 언약을 받은 여자이기에 마침내 언약의 주인이신 하나님 능력으로 잉태한 연고로 자유한 아들을 낳았으니 자유한 우리 어머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육신을 어머니라고 말하며 세력화시키는 종교는 거짓 영에 사로잡힌 마귀 세력으로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이렇듯 영을 육체의 언어로 표현함은 본디 영이 육과 마찬가지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다고 합니까? 육신은 길어야 백년 일 것이지만 영은 영원히,영원히 오늘을 삽니다.
때문에 영의 사람은 태초와 종말,곧 처음과 나중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란 썪어질 육체와 자아를 날마다 부인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들은 장구한 세월 동안 아무리 힘써도 여전히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미몽 상태이지만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지상에서부터 이미 자신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영생이신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 생명 성분을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왜냐면 자신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신다고 말씀하신 그 예수 생명을 위(물과 성령)로부터 다시 태어난 순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말라"요3:5~7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유일하게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들의 목숨을,그것도 가장 잔혹한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까지 내주셨을까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시18:4~5
다윗의 이 시를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속해 주시려고 겪으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더욱 더 심층 깊이 밀도 있게 들려주시기를 심히 사모하면서도 두려운 것은 왜일까요?
그분은 나와 동일한 죄인이 되사 내 전부를 체휼하셨지만 아직도 나는 그분을 체휼할 능력,곧 선한 능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내 끝모를 바닥을 알고 있기에 순간 순간 그분의 고난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우리 모두는 다 넘어진 연고로 태초의 부부 같지 못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발가벗으려 하지 않습니다. 발가 벗으면 정죄 당할까, 흉 잡혀서 수치심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할 수만 있으면 얼굴과 어깨와 눈빛에 무게를 잡습니다. 가리운 것 만큼 친밀감은 사라지고 연대감도 옅어집니다. 아예 다 그런거라며 덤덤이 스스로를,상대방을 감싸며 살아갑니다.
말씀은 분명히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으로 살라고 명하시지만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요?~^^ 무엇이 이토록 지리멸멸하게 방해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며 기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사랑은 오래도록 끝까지 선을 기대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동등한 인격체로서 피차 마주보며 상호보완, 상호교제,상호연합체로 살아감이 마땅함에도 아예 포기하고 사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그저 가정을 위해 남편이든,아내이든 나 하나 죽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부당한 언사나 학대를 참고 사는게 정말 옳을까요?~^^
비록 질료는 그 사람의 것이나 그것을 가지고 돕는 배필을 만드는데 큰 역활을 하신 분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돕는 배필을 본 순간 충만한 기쁨의 고백과 함께 여호와께 묻지도 않고 본인 스스로 이름까지 여자(잇샤 )라고 지어 줄 정도로 당당했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고대 사회에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 합니다. 생각하면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돕는 배필'로 명명해 놓으셨으니 이번엔 하아담이 그를 무엇이라 명명하는지 보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남자(잇시)에게서 나왔으나 여자(잇사)라고 부르리라고 그 자신의 소유권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화답의 멧세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성경을 어릴 때부터 듣고 읽으며 나이 먹어 왔지만 아무래도 지혜는 같이 안자란 것 같습니다. 왜냐면 성경은 여전히 아리송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창세기는 그리스도로 풀지 않으면 도무지 풀리지 않으며 뭔가 이해가 간 것 같아도 석연치 않습니다.
특히 "부모"에 대해 여러 생각함은 그 사람의 부모가 내 부모도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은 분명 마지막 아담의 그림자이면서도 동시에 각 성도들의 고유한 자신들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다면 아득한 옛날에 살았던 그 사람의 부모가 지금까지 살아계셔서 여전히 우리의 부모로 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부모를 떠나 여자에게로 와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조건을 채워주신 분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그분만이 진실로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 보좌를 떠나 교회인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혼을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빗대어 노래한 아가서에 보면 너는 나의 것,나는 너의 것이라는 소유권 주장은 피차 단단하게 결속된 연합이 아니면 불가능 한 것으로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아담인 그 사람은 이제껏 여호와 하나님과 연대하며 연합이 무엇인지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 증거를 찾아 본다면 "이르되"와 이름을 불러 준 것입니다.
창조주만이 존재의 시작을 선포할 수 있으며 창조주만이 맘껏 창조를 표현하실 때 쓰신 "이르시되"를 그 사람도 사용했으며,여자라고 이름 지어 줌으로서 여자라는 존재의 시작을 알렸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도 선포한 것이 그렇습니다
하다면 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신대로 여자에게도 해줄 때 상호 내주, 상호연합하여 한 몸의 연대감을 이룰 수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남자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은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이미 심어 놓으신 당신의 친밀성이 그 사람의 성품이 되었다면 분명 그러한 성품은 그녀와 한 몸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친절함도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친밀성이야 더 더욱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돕는 배필이 생기기 전까지 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하게 지낸 사귐의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허나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어느 정도인가는 갸늠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다 자신을 두신 분이 바로 그 분이며,동산 중심에 생명나무와 선악 지식 나무를 있게 하신 분도 그 분이며, 에덴에서 발원한 하나의 강이 동산을 적시며 동산에서 갈라져 온 땅 사방으로 흐르는 네 근원의 강이 형성된 즈음에, 자기와 의논 끝에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와 선악지식나무에 관한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제사장 직분으로 이끌어 주신 분도 그 분이며, 모든 짐승들과 새들을 자기 앞에다 데려다 주신 후 자기가 어떤 이름으로 그것들을 부르는지 유심히 살펴보신 분도 그 분이며,자기 갈빗대로부터 자기 아내를 만드신 후 자기 앞에 아내를 데려다 주신 분도 그 분이라는 것을 아는만큼 그 사람도 분명 여호와 하나님을 닮았을 것입니다.
한 쌍을 짝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전의 방법이 아닌 다른 양상으로 이 부부와 함께 하실 것을 은연 중 암시한 것이 창2:16~17절,24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그 사람에게 당신이 말씀이시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셨고 그 사람 안에 넣어 주신 당신의 생기도 있으니 이제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인격체로 말씀과 명령 따라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부모 마음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 떠나실 때 다락방 강요의 말씀과 뱀과 전갈과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대로 성령으로 동행해 주신 것과 비슷한 패턴이 아닐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껏 그 사람과 함께 하심은 쌍방 원함보다는 일방적일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모든게 처음인 그 사람인만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해줄 일들이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허나 이제는 아내도 있고 무엇보담 더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그들을 지으신만큼 그 자유로운 원함 속에서의 만남을 원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함에 가장 섭섭해 했던 사람이 잇샤가 아니였을까 추론해봅니다. 자기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그 사람(하 아담) 앞에 섰을 때 잇샤가 본 하 아담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멋졌을까요? 우스운 질문이지만 누구라도 그분께서 주신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가능한 질문입니다
허나 그 사람은 마누라한테 폭빠져 여호와 하나님께 '왜 부모를 떠나서야만 연합이 가능한 것일까요?'라며 물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잇샤는 그런 잇시의 태도를 알아 차렸을 것이나 둘은 그런 것들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선악지식나무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잇샤는 분명 잇시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지만 그 또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직은 부모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씌워주신 영광과 존귀의 관이 능력이 되어 어떠한 벌거벗음도 수치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의 부모라는 확증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야말로 잃어버린 가장 찬란한 족보를 어디서 발견해야 할까요? 그것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따라 가다 보면 우리들의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런 능력의 부모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십대 때 이 족보를 확인한 순간 샛별 하나가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기분이였는데 벌써 수 십년이 흘렀다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단이요 ~~~~~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라"눅3:23~38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이 내 아버지가 곧 너희 아버지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첫댓글 아멘. 아멘!
화이트님!
여긴 지난 주일날 푸근한 눈이 내렸답니다
함께 해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