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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삼상14:16~17
요나단의 믿음은 여러 날 동안의 시련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이 되여 여호와께 표징까지 구하게 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곧 요나단을 위하여 큰 떨림의 능력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땅이 흔들리고 큰 떨림의 두렴과 공포에 휩싸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리 저리 흩어지는 것을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이스라엘 파수꾼이 보게 됩니다.
사울의 첫 반응은 전쟁조차 스스로(홀로) 주관하시는 여호와를 알고 경배하기보담은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라는 것입니다. 점호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 어느 누가 나간들 블레셋 진영에 지진을 일으킬 것입니까? 또한 그들을 큰 떨림의 공포스런 도가니에 빠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눈 앞에 펼쳐지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도 <이는 여호와이시다>라며 온 백성과 함께 여호와께 합당한 영광부터 돌린 후 점호해도 늦지 않습니다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울 같은 저를 포기하시지 않고 반드시 내가 에브라임을 불쌍히 여기리라는 말씀대로 불쌍히 여겨주시니 이 죄인이 감히 여호와를 사랑하나이다.
사울의 첫 반응이 왜 점호였을까? 요나단이 나갔을 거라는 추측을 확인 받고 싶어서일까?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나갔다 하자 왜 사울은 에봇을 가져오라고 했을까? 아들의 생사 여부를 알고 싶었을까? 공격 여부를 묻고 싶었을까? 사울의 속내를 어찌 알까 싶은데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 속 보좌엔 여호와 왕이 아닌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말이 하나님 말이고(삼상14:19) 자기 맹세가 하나님 맹세이고(삼상14:24)자기 믿음이 하나님 믿음이라는(삼상14:33) 것입니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에봇)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 (에봇)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삼상14:18~19
사울 왕은 블레셋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해지자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합니다. 상황 따라 여호와를 찾다가 상황이 변하면 여호와 찾기도 멈춥니다.
"23: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24: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25: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삼상14장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날에 금식이라뇨? 구원은 곧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마땅히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할 때입니다. 예수께서도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집 손님이 어찌 금식하겠느냐?고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며 비아냥거리는 자들에게 반문하신 적이 계셨습니다
사울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공동원수를 내 원수라고 말합니다. 자신만 특출하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 같지 않습니까? 신랑되신 여호와께서 신부 이스라엘을 오늘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전리품 중 먹거리를 풀어서 먹고 마시며 남은 전쟁에서도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기뻐하며 싸우면 될 것을 거기에 무슨 율법 행위를 덧붙히겠다는 것입니까? 예수 구원에 무엇을 더할 것이며 무엇을 뺄 것입니까? 우린 어디까지나 이미 구원 받은게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자신과 공동체 구원의 충만한 완성을 위하여 힘써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자기 원수인 블레셋을 진멸시키는 도구로서 백성들을 부릴 것이라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여서 보낼 것이지 굶기는 것도 부족해 먹으면 저주라뇨?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선한 율법을 갖고 연약한 백성들을 쥐락 펴락하는 것은 아닌지 헤아려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의 벗을 자기 원수로,여호와의 원수를 자기 이웃으로 삼을 수 있는 확률이 높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여호와의 원수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생포했고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를 원수로 여겨 죽이려 했습니다. 남말 하는게 아니라 제 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를 수없이 죽이려하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동조한 자이기 때문입니다.반면 끝까지 싸워서 여호와의 원수인 아말렉 같은 내 혼과 자아는 죽이지 못한채 살아온 허다한 흔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수풀에서 꿀이 줄줄 흐르는데도 못먹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지금도 먹으면 치유와 축사가 일어나며, 허물과 죄로 죽은 영들을 살려내는 복음(구원)의 젖과 꿀을 먹지 못하도록 활동하는 율법조문들이 내 속에 있다면 성령께서 책망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사울이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을때 그가 어찌 우리를 구원하랴며 반대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 후 여호와의 영에 의해 크게 감동된 사울이 암몬의 나하스 왕과의 전쟁에서 압승하게 됩니다. 이에 사울을 반대하던 무리를 색출하여 죽이자는 백성들이 나타납니다. 그 때 사울은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을 구했으니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일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근데 이번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가 못내 씁쓸한가 봅니다
이 구원에 자신의 공로가 설 자리가 없다는게 영개운치 않아서인지 사울은 금식을 선포합니다.사울은 자기 열심으로 이룬 구원이 여호와의 구원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룰 자가 한 명도 없건만 사울은 자기 열심이 특심입니다.
율법은 율법으로서 선하게 보존시켜야 하거늘 이렇게 멋진 여호와의 구원을 감사함과 기쁨에 담지 못하고 금식이란 율법 행위에 담으려니 율법의 선한 이미지만 파손시켜 사람들에게 율법에 관한 반항심과 피로감만 심어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사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가게 하셨으므로 능히 지역을 더 넓혀 더 크고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건만 힘이 부족한 나머지 코 앞에서 적들을 놓치고 눈 앞에서 전리품들을 놓쳐버립니다.
새 포도주(새 언약의 피)는 율법(구약의 짐승의 피)과는 질과 차원이 다르기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게 보존되게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둘 다 보존이 안됩니다. 새포도주는 성령의 법이란 새 부대에 담아야 보존됩니다. 짐승의 피는 율법에 담아 구약으로 보존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성령의 법에 담겨 신약으로 보존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리라"누가5:37~38
요나단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행위였기에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왕의 금식 명령을 듣지 못한 그가 꿀을 먹자 백성 한 사람이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만일에 왕이 금식 맹세를 시키던 그 자리에 요나단이 있었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아뢰었을까 싶습니다 암몬의 나하스 왕을 무찔렀을 때 아버지 사울 왕이 한 말을 기억했다면 아버지께서 그 때 "오늘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날이니 사람을 죽일 수 없노라"고 하셨던 것처럼 저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오늘만큼은 금식할 수 없나이다.그리고 이 날에 저주도 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신약의 성도라면 아무리 왕의 명이라해도 이런 상황에 육신의 금식은 오히려 여호와의 구원을 힘써 대적하는 율법 행위로 자기 의를 이루려함이라고 밝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나라에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지만 질서를 주신 여호와의 선하신 뜻을 더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삼상14:29~30
우린 아간의 탐심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을 도둑질하여 숨김으로서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만든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여7:25)"라고 한 말이나 요나단이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라고 한 말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사울의 탐심도 아말렉 전투시 진멸해야 할 것들을 진멸치 않고 자기 소유로 삼습니다. 요나단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의 탐심이 선한 이웃을 아프게 할 수 있고 성령님을 탄식케 합니다. 이 탐심은 비단 물욕만 뜻하는게 아닙니다. 명예욕과 공명심과 심지여 영적인 탐심도 그렇습니다.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삼상14:31~34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자들에게 내린 사울의 잘못된 금식 명령은 결국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울은 이때라도 여호와께 제가 잘못하여 백성들이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 혼자 믿음 있는 사람 같습니다. 짐승을 잡아 큰 돌위에 올려 놓으면 피가 아래로 흘려 내리게 됩니다. 백성들은 죄를 알건만 사울 왕은 아직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구원의 날에 힘써 구원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 싸워야 할 백성들에게 율법적인 금식을 명함으로 허기진 저들로 하여금 짐승을 피채 먹게 만든 죄악을 깨닫도록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의 피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율법의 피인 짐승의 피에 혼합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로 새 언약의 피를 사랑과 성령의 자유한 법에 담아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을 주소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