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7장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 하는 것을 행함이라"
어릴 적엔 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만 있는 줄 알았지 율법의 서문(출20:2)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얼마나 철부지였던지 얼마나 제 영이 죽어 있었으면 그랬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질뿐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출20:2
도대체 제가 애굽 땅과 애굽의 종된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런 말씀을 하실까? 라는 질문조차 못했던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으니 영적 귀먹어리와 영적 벙어리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떻해 십계명은 소중히 여겼을까? 생각하면 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영적 소경일수록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두렴가운데 산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서문에 근거하여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신령하기에 그 뜻대로 살기를 자기는 원하나 원치 않는 일을 행하는 자신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분명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었다는 거룩한 감동 속에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거룩함을 이루겠다고 선포했는데 막상 의의 지체가 되어야 할 자기 몸이 불의를 행하고 있으니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지 고민스럽다는 겁니다.
자기 육신이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날부터 죄 아래 팔려가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하여 자기 육신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것도 죄의 뜻이 아닌 신령한 뜻을 행하자고 누누이 다짐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데도 그러하니,이는 마치 자기 육신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대드는 격입니다.
분명 이제는 저를 죄의 종된 옛 세상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건만 어찌하여 제 하는 짓은 선이 아닌 악만 행하는지 도대체 이 상황이 말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못먹으면 배고프고 못자면 졸립고 때리면 아프고 너무 과하게 일하면 앓아 눕고 억울한 말을 들으면 부아가 치밀고 남을 위해 살지 못해,좀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늘 가슴 한 켠이 시리운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원인을 다음과 같이 규명합니다.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카톨릭성경)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입니다.카톨릭성경)"
율법 서문에 근거하여 율법을 신령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울은 이제는 자신의 절절한 실전을 토대로 다시한번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저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했지만 살지 못해 괴로운 현실 그대로 하나님께 반응을 보여 드리는 자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아무리 말씀대로 못살았어도 아버지는 제 아버지시니 가능할 것입니다.
선한 말씀에 전인격체로 올인한 결과가 비록 영광이 아닌 상처뿐일지라도 그분께서는 참으로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결과보다 더 저의 전심으로 주의 뜻을 이루려는 과정을 중히 보시는 분이라는 걸 알면 결과에 연연한 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현 상황의 난해함들을 사랑하며 감사하며 여유있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드디여 알아냈습니다. 자기가 행한게 아니라 죄가 한 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근데도 바울의 수심은 걷치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생각에 악를 행한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죄라면 나는 손털고 일어나면 그만인데 왜 더 괴로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악을 행하는 주체자인 죄가 내 밖에 있는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냐?는 질문에 아담은 당신이 주신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브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이브는 뱀이 먹으라해서 따먹었다 합니다. 여기서 먹었다라는 의미는 먹어서 이미 내 몸의 형질이 되었다(획득형질)는 것입니다.
단 한번의 불순종이란 악한 행위가 이런 현상을 가져올 줄이야! 그러니 순종이란 의로운 행위로 인해 나타날 현상이야 더 더욱 뚜렷하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율법은 내 속에 나도 있지만 죄도 있다는 것을 알게해 준 것입니다. 죄는 카멜레온 그 이상으로 자기를 숨기는데 교묘하여 죄가 해놓고도 내가 한 것처럼 내 인격을 먹고 마시며 행동하니 실로 누가 나이고 누가 죄인지 식별이 안될정도입니다
허나 말씀이 들어 오니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이 판단되어지니 그 앞에 내가 벌거벗은 자로 드러납니다.
아멘!
이로보건대 제가 말씀(율법과 복음)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선포하며 살지 않았다면 어찌 말씀이 제 입과 목젖을 지나 배 속까지 들어갈 것입니까? 진실로 입에서는 달고 오묘했으나 배 속에서는 쓰디쓴 말씀입니다. 그러나 잘게 잘게 다 소화가 되어 죄의 형질을 획득한 제 온 몸으로 공급 되어지면 말씀이 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곧 제 전신에 거주하고 있는 죄를 샅샅이 식별하여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말씀을 꿀꺽 삼키기를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처럼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하기를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중심의 과정을 보시지 제 결과물로 저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과정을 보시지 않고 결과만 보신다면 한 소년이 드린 오병이어가 어떻게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결과를 창출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순간 순간 모든 일에 감사 찬송으로 전진하십시요. 비록 순간 순간 죄만 나타날지라도 주눅들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더 정죄함이 없으신 예수 품으로 달려가 예수 이름을 높이며 춤추며 찬양하십시요
바울은 성도들이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과 음란과 위선과 외식과 허무와 절망과 어둠 앞에서 그런 것들에게 위축되어 다시는 죄를 안짓겠다며 어떻해 하면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을까 조목조목 분류하여 쓰고 외우면서 전 남편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롬 7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육신에 죄는 거하는데 선은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계시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참함! 이 흑암! 이 바닥모를 음부!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우린 한 유대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눅18:18~1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21살 때 이 말씀을 품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분명 예수님께선 선하신데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고 물으셨을까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선하신 하나님!으로 불렀다면 예수님께서는 엄청 기쁘셨을 것입니다.허나 그는 예수님을 인간들가운데 선한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왜 인간을 선하다 하느냐?'라고 질문함과 동시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라는 답도 주신 것입니다.
바울도 육신의 존재 안에는 선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선이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던 자였으나 복음을 안 뒤 그런 말이 얼마나 오류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니깐 전남편을 더 잘 섬기겠다고 율법으로 돌아가봤자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선이 없는데 어찌 선한 율법을 행할 것입니까?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17절에서 죄가 내 속에 거한다고 하셨는데 다시 또 강조합니다.
"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이 문제가 육신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 즉 법이 문제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곧 한 법(한 다른 법,죄의 법):하나님의 법 (마음의 법)을 깨닫습니다. 한 법은 육신(지체,죽을 몸)이 섬기고 하나님의 법은 속사람이 섬깁니다.
여호와께서 뱀에게 저주하시길 너는 평생 흙을 먹고 살 것이라 한대로 옛 뱀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신을 먹고 사는 하나님의 법이 아닌 다른 한 법,곧 악의 시스템을 구축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뱀의 머리를 여인의 후손이 박살 낼 것이라고 약속하신대로 아들 예수님께서 하셨으니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지상을 침노해 들어 온 셈입니다
우리가 이 두 법에 낑겨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무기력하게 됩니다. 또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치고 받을 때 마음은 전쟁터를 방불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위대함을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해 할까요?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도의 현실을 은닉하거나 회피하는게 아니라 깨끗하게 심플하게 정정당당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탄식조로 인정한다는게 성도의 자존감을 구기는 것 같지만 이 탄식이 없다면 새 남편 되신 예수님을 경배하겠습니까?
죄에 팔려가는 사망의 몸이 되어버린 나!허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심히 사랑하며 즐거워하는 나! 누구라서 이렇게 사지가 찢겨져 사망의 불못으로 던져질 절대절명에 처해져 있는 나를 통전적으로 구원해 주실까요?
성도는 이미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복음에 아멘한 자요,선포한 자인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그 이름를 높히며 감사하며 찬양함에 어찌 주저하겠습니까?
비록 육신을 입은지라 여전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지라도 성도를 정죄하시지 않는 새 신랑 예수 품안에 거하니 실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이 아닙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