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나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에게 져서 낭패를 볼 때 정죄에 빠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었노라고 선포해주십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을 도와 다시는 육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기도의 영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는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말씀기도보담은 육신에 져서 육신의 뜻과 요구를 이루기 위해 종교적인 열심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르는 이 육신에 찌든 저(우리)를 위해 밀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하나님께 기도해주십니다.
성도가 육을 따르지 않으려면 제일 먼저 요구되는게 십자가에 정과 육을 못박는 것입니다. 이런 자아와 육신의 죽음이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저(우리)를 품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인 근거,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터가 있기에 그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사 능히 육을 죽이게 도와 주십니다.
젊은 날에 성령님께서는 제 손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체험케 하셨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신비한 영적 체험이 실제로 삶의 현장 속에 고스란히 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알고 신비한 체험이 있어도 실제로 자신의 정과 육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도록 성령의 힘을 구하지 않으면 성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영화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육은 육을 위할 수 밖에 없는데 어찌 육이 육체의 자아와 정과 육을 못박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약함을 아시기에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며 다방면으로 도우십니다. 설마 이런 것도 도우실까? 머뭇거리며 구하지 않는다면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자신의 뜻을 자기 노력으로 이루려는 자아 완성에 있다면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연약한 성도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만물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구속 사역에 성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선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이 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유일한 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유일한 선이시며,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를 선한 것이라곤 도무지 나올수 없는 천한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은 천한 동네 아니라 그 어떠한 부유한 동네일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수많은 진리의 아들들을 낳으심으로 당신을 열국의 아버지로 영화롭게 해주신 것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갈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뜻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주를 알아 갈수록 자격 없는 자를 택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 감격하게 되고,이 감사 감격의 폭과 깊이만큼 주를 사랑함의 마음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과정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영광)으로 빚어져 영화롭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 시제로 말씀하십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우릴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은즉 이 일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지붕 위에 바이올린'이란 영화에서 다음에는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해 달라고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라 없이 이 천년 가까이 유랑하던 역사와 유대인 대학살 과정을 겪으며 선택 받은 선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말을 할까?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칭의일뿐 실제로 의인의 형상(캐릭터,성품)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라고 칭한 자들을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여 영화롭게 하셨다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도무지 불가능한 저희들에게 성령님을 주셔서 가능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성화를 이루어 나갈 때 입에서 쌍욕도 나오고,때론 거짓말도 나오고, 병들고 외로운 작은 소자들과 동일시한 예수를 핍박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소리 소리 지르기도 합니다. 당신께서 절 택하셨다면 이런 고통만큼은 피해가게 해줘야 되지 않겠냐고..등등.
실로 저말고 다른 사람을 택해주세요라고 말할뻔한 순간,즉 실족 당할뻔한 순간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저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은 확실합니다.
말씀의 힘,특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선포의 힘은 비실비실한 저를 일으켜 세우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능력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믿음 없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그 값을 카운트 할 수 없는 아들의 생명을 저희를 구하시려고 십자가에 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저희에게 아들의 영화로운 형상을 덧입혀 아들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일은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33: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령님뿐만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정말 든든한 빽입니다. 정죄하는 자가 정죄받을 것입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땅에서 성도이기에 그리스도(복음/말씀/믿음)로 인하여 겪게 되는 모든 환난,박해,적신,위험,칼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큽니다. 기록된 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 당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 함과 같으니라. 실로 바울은 그러했습니다.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밍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