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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의 법 아래 가둔 율법의 그 어떠한 세력도 저(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보사역이 말하는 바 속죄와 속량과 화목의 완성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획득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라 함은 그 어떠한 세력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심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화평을 누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바울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감격과 기쁨은 측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신도인 저조차 이 진리로 인해 큰 평안과 확신과 자유함을 누린다면 그는 분명 더 기뻤을텐데,그 충만한 기쁨만큼이나 큰 근심과 고통이 있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안믿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하며 박해하는 동족들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맛볼 수 없는 기쁨은 이렇듯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족 친지 친구 이웃들로 인해 근심하며 고통하도록 만듭니다. 영생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영벌에 처해지는 그들의 영원한 고통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 도무지 동족들과 화합되지 않고 지금 여기서부터 동족들과 나뉘어지는 고통은 가히 육체의 살이 찢기는 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과 근심이 거짓이 아닌 참임을 자기 양심이 안다 합니다. 이런 그의 고통을 그리스도와 성령님께서 모르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울 주님께선 저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가 당할 영원한 형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으로서 그 구원을 위해 저들의 저주를 걸머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사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하셨던 가장 참혹한 저주인 아버지로부터의 버림 당하심을 홀로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차라리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동족이라면 그토록 근심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롬3장에서 바울은 이미 유대인의 나음은 범사에 많다시며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유대인의 나음이 범사에 많다함은 그들이 범사에 말씀과 동행했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에 그 유익함은 헤일 수 없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에게는 기록된 말씀과 함께 천사도 흠모하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까지 부어 주셨으니 성도의 유익함에 관하여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을 이스라엘 사람이라 함은 양자 됨 곧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 받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에 강림한 영광스런 현장에 조상들이 있었으며 언약과 율법을 모세를 통해 세우셨으며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두신 성전과 지성소가 있었으며 예배와 약속이 있었습니다
약속 중의 약속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시는 영광을 차지합니다.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나 동족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합니다.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카톨릭성경)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범사에 많은 유익함을 갖고 태어난 동족들임에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기 민족으로 인해 고통하는 중에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위로 받게 됩니다.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물도 안마시겠다는 유대인 결사대가 형성될 정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할 때 예루살렘 성에는 예수룰 믿는 수 만명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로보건대 비록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그리스도)이심을 전민족적으로 시인하지는 않았으나 수 만명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건 하나님 말씀이 폐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왔다 하여 다 이스라앨이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록된 말씀을 통해 명징하게 갈라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씨라해서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약속한 말씀으로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의 씨만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삭이 리브가의 몸에서 쌍둥이를 잉태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들이 작은 소자들과 동일시한 예수를 섬기며 복음을 위해 달음박질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원함이나 열심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그렇게 살도록 선포해준 말씀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섬기며 섬김 받는 역활에 관하여 성경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린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 앞에 무엇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그것도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죽어 마땅한 자로서 이 하나님 심중에 있는 애증의 불가사의를 놓고 무슨 토론을 할 것이며 무슨 하나님의 속내를 보여 달라고 할 것입니까? 당신의 속내를 알면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여 너도 나도 다 사랑 받는 야곱이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차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은 쌍둥이들이 태어나기 전, 그들의 선악간의 행위가 제로인 상태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야말로 오롯이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우리의 구원이 선악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입니다. 서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성실 근면 희생 정신 특히 종교적인 열심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부르시는 하나님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된 자들은 하나같이 육신의 사람 에서는 미워하고 하늘의 장자권을 사모하는 영의 사람 야곱은 사랑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사람은 영의 사람보다 결코 클 수가 없습니다.
"14: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아멘!
우리를 부르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스스로 계신 자는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심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온 땅에 나타내시기 위해 바로의 강팍한 심령,곧 완악힌 상태를 고스란히 들어 쓰십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