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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를 믿지않는 동족으로 인해 고통하며 근심하는 바울을 감정적인 공감에만 그친다면 롬9장~11장에 기록된 복음의 진보를 함께 이루어 나간다는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만일 율법과 선지서로도 이스라엘의 구원이 실패했다면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될 것입니다
제게도 이 문제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실패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온 인류의 소망인 여호와의 말씀에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다면 굳이 성경에 올인 할 필요가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의가 깃드인다하면 과연 믿음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말씀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없어서 일까요?
바울이 이 문제를 놓고 혹여 여호와의 말씀이 폐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속이지 않고 공개함으로서 함께 답을 찾아갈 수 있다는게 참으로 즐겁습니다. 이런 질문에 답이 없다면 율법의 완성인 복음에 대한 믿음의 절대성조차 균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바울이 어찌 답을 찾아가는지 주목하면 그는 먼저 자신의 동족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치 않는 고통스런 현실을 현상 세계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묵시의 세계인 하나님 보좌로 나아가 기도로 아뢰입니다.
그의 고통스러운 양심을 증거해 주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중에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절대적 유산인 모세오경과 선지서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에 접근하여,기록된 말씀이 내주는 길을 기록된 말씀과 함께 걸어 갑니다. 그 결과물이 롬9장~11장(말씀의 증가/생수의 증가/생명의 증가/복음의 진보)입니다
롬9장~11장은 뭇사람들과 심지어 바울 자신마저 품을 수 있는 인간적인 생각과 회의와 궤변과 말씀에 대적하는 질문 (반문)의 가지들은 다 잘라내고 오직 명료한 말씀이 내주는 길을 걸어갈 때, 오히려 말씀이 폐해지는게 아니라 말씀이 증가되는 영적 현상을 체험하며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시 바울답습니다. 아니 역시 바울을 작정하시고 부르신 긍휼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실로 제게서도 저를 부르신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와 그 아드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의 내주하심 속에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여호와의 말씀이 폐해진게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문자로 기록된 말씀을 열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는 여러 번 '기록된 바'로 소급한 말씀이 어떻게 현 역사 속에서 풀어졌고 풀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말씀을 증가해 나간 것이 그렇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기록된 말씀과 리브가에게 하신 기록된 말씀으로 입증함으로서 모세오경이 폐하여 진게 아니라 지금도 여호와의 말씀은 유효하다고 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고 기록된 말씀으로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는 말씀을 증가시킵니다.
이 말씀의 증가는 여호와의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에 좌우 되는게 아니라 절대자에 기인한다는 주축돌을 꺼내어서 보여 준 후 더 단단하게 박는 믿음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시 또 기록된 바 바로에게 하신 말씀(롬9:17)에 접근하여 바로를 통해서 역사하신 절대자의 절대 권한을 행사하신 것을 모두가 보고 알고 깨달아 그분의 구속사 밖으로 떨어지지 말고 안으로 들어 올 것을 설득시킵니다.
다시 또 바울은 기록된 말씀에 덧붙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는 말씀을 증가시킵니다. 할렐루야!
이렇듯 말씀의 증가는 보화의 증가요, 생명의 증가요,하나님과 친밀함의 증가요,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의 깊이를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복음의 진보를 이루어 나갑니다. 아멘!
바울은 긍휼히 여길 자,완악히 여길 자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하시고자 하시면 하신다는 말씀 후, 얼마든지 있을 법한 질문을 통해 다시 또 절대주권이 미치는 영역이 통치와 다스림뿐만이 아니라 창조 영역에도 그러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롬9: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여전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누가 그 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 )"
죄인을 돌이키게 하셔야 하실 분이 완악케 하사 멸망시키시면서 어찌 심판자로 책망하십니까? 절대자 뜻이 인간을 완악하게 하겠다는데 어찌 인간이 거역하겠습니까?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대적하는 질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문자적으로,특히 몇 절의 말씀으로만 보면 실로 귀한 그릇으로 지음 받은 자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아멘!"으로 화답할 것이지만 천한 그릇으로 지음 받은 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남말이 아니고 제말입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대학 교수하는 친구가 제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친구를 데리고 물건 구입하며 2리터 드링크 8개 담긴 것과 4리터 밀크 4개 담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팍팍 들어 올려 큰 카터에 옮기고 나니 '난 네가 이런 일 하는 것 싫어!"'라고 말하는데 속으로 나도 '맞다. 나도 이런 일 하는 것 싫어'라고 중얼거렸답니다.
허나 나를 창조하신 이가 나는 이리 천하게 쓰임 받는 천한 그릇으로 만드셨고,너는 귀히 쓰임 받는 귀한 그릇으로 만드셨다면 어쩌랴! 정말 그럴까요?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여기서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모세로 대표되는 긍휼의 그릇을 말하고 천히 쓰임 받는 그릇은 바로로 대표되는 완악한 그릇,곧 진노의 그릇을 말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롬5장에서 바울이 말씀하신 바 인류의 두 대표자인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 예수를 재차 묵상하게 만듭니다. 왜냐면 바울은 첫째 아담의 후손인 우리를 가리켜 본질상 진노의 자식(그릇)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긍휼의 복음)께서 진노의 자녀 (그릇)를 찾아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거절하지 않고 영접하여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품으면 긍휼의 자녀(그릇),복음의 자녀 (그릇)로 새창조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할렐루야!아멘!
그런즉 복음을 담은 자녀가 귀인이요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요 복음을 거절한 자녀가 천인이요 천히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말씀조차 우리들의 안목의 잣대인 외모와 체면과 학벌과 직업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교정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천하게 쓰임 받는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께서 당신 권한으로 천한 그릇으로 만드셨다고 도장까지 찍는다면 숨막히며 무기력해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절대자의 절대 주권을 복음으로,새 역사의 창조로 접근하지 못하면 지독한 운명론과 숙명론의 올무와 덫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놀랍게도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고 강한 어투로 허물하듯 물어 오던 숨결을 진정시키고 아무리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절대 주권자의 선한 성품을 소개해 주십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이든 하고자 하시면 하시는 절대 주권자께서 히브리 여인들이 사선을 넘나들며 이제 마악 출산한 남자 아가를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한 패역한 바로를 그 즉시 멸하시지 않고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어디까지 존중하셨길래 그런 잔인한 바로를 찾아가 모세를 통해 내 백성을 내보내 달라고 관용한 인격으로 말을 건네셨을까요?
그냥 한 방에 쓰러 뜨리고 확 끄집어 내셔도 되실 분이 열 번을 기다리고 참으신 끝에 출애굽시켰는데도 악착같이 쫓아오다 홍해 바다에서 죽어버린 바로에 대하여 과연 그는 무죄하나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진노의 역활에 충성한 종이니 상을 주셔야 한다고 데모라도 해야 할까요?
그렇게 짜여진 진노의 역활에 충성하느라 자신의 양심을 흔들며 이적과 기사로 먼저 말을 건네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요? 그가 만일 홍해바다 앞에서라도 여호와의 크신 위엄과 권능에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면 바로 자신은 물론 수많은 부하들과 말들의 생명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바로의 사건을 보면서 바로가 강팍한 마음을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자유를 여호와를 만나는 쪽으로 행사할 때 여호와께서도 돕습니다. 도무지 애굽의 종으로 살면서도 자유인 되기를 소망하지 않았던 히브리 노예들을 자유케 하신 분께서 어찌 여호와께서 자신의 절대 주권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사랑의 법으로 해방시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실로 그렇게 이미 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믿고 이 생명과 성령의 법이 발하는 빛으로 일어난 자들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새롭게 지음 받은 귀인이요, 충만한 긍휼을 담은 긍휼의 그릇인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사슬에 메어 그 생각들이 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노라는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그들의 정죄감을 벗게 해주는 고급진 섬김의 긍휼을 베푸는 그릇으로 귀히 쓰임 받는 귀인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완악한 바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정말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을 베푸심으로서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을 주셨다는 것은 저 같은 본질상 진노의 그릇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를 그렇게 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주권자라 해서 인간을 함부로 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존중하며 항상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을 위해 자유를 행사할 것입니다.
이 오래참으심과 관용하심의 신의 성품이 육화되어 오신 분이 인자 예수이시며 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오래참으심과 관용하심의 씨 중의 씨가 바로 약속의 씨이신 예수 씨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가 미리 말 할만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9:29
우리 안에 이 긍휼로 인해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는 예수 씨가 없었더라면 저는 벌써 진노로 멸망 받았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즉 인류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새 힘을 주는 복음의 능력이 아닌 현재의 어려운 처지를 더욱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숙명론에 빠지도록 풀어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의 씨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과 리브가에게로, 야곱과 레아에게로, 유다와 다말에게로 각 세대 마다 이어져 간 것을 보면서 <언약의 씨>가 가진 보편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언약의 씨는 어느 특정한 한 세대의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세대의 모든 보편적인 사람들을 걸쳐서 죽지 않고 계속 낳고 낳고 낳고의 탄생 족보로 입증 된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첫 장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그렇습니다.
또한 지금도 모든 약속의 마침으로서의 완성된 예수 씨로 탄생된 교회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교회를 낳고 낳아 셀 수 없이 많은 생명 족보(생명책)가 하늘에 있음을 믿음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의 절대 주권은 모두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다 포함시키십니다.
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아니 어쩜 보통 이하의 하층민들의 이야기 속에 무슨 차별적인 선택이 있겠으며, 우리가 죽던지 살던지 니들 멋대로 살아 버리라는 무책임적인 유기가 들어 설 수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긍휼로부터 흘러 나오시는 오래참으심과 관용하심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죄값을 치르심으로서 공의도 행하셨고 완벽하게 다 용서했노라고 선포하셨는데 뭐를 더해 달라는 것인지.
누구라도 이미 지상에 찾아 오신 예수 사랑을 향하여 마음과 귀를 주기만 한다면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 받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차린 밥상을 기쁨으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유조차 그분의 절대 권한에 달려 있으니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것입니까?
"23 :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아멘!
아멘!
아멘!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우린 정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분의 절대 주권이라해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시거나 묵살하시거나 어느 특정한 자들만 위하여 피 흘리신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사 모두를 초청하신 절대 선과 절대 사랑과 절대 구원의 어떠함을 알려 주셨습니다.
덕분에 율법의 의를 따르지 않았던 이방인인 저도 예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를 얻어 아버지와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허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를 따른다 했지만 이르지 못한 것은 모세 오경과 선지서를 통해 증거한 그리스도를 듣고 믿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니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 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절대 권한으로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듯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대속해 주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악인들이 이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