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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장1 :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2 :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엘리야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고발해 호소하기를3 :' 주여 그들이 주의 예언자를 죽이고 주의 제단을 부수었습니다 오직 저만 남았는데 그들이 제 목숨도 찾고 있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4 :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 ' 고 하셨습니다 5 :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선택을 받아 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6 : 그리고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9장에서부터 선민 이스라엘이 구원자 예수를 거절하여 그를 죽였고 그 연장선 상에서 그의 몸된 교회와 십자가의 의를 전하는 종들을 핍박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선택은 여전히 유효한가?를 놓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 유효함의 첫번째 증거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자기 의로 나사렛 예수와 교회를 대적,핍박하던 극악한 불순종의 사람임에도 꿈에서조차 생각치 않은 나사렛 예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은 물론 사도의 직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바알 숭배로 하늘 문을 닫아 비가 없었던 아합 시대 때 엘리야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신 말씀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곧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은 칠천명을 당신을 위하여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라함은 불순종과 배역을 일삼고 있는 이스라엘임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당신의 나라요, 당신의 택한 백성으로서 당신을 열방에 나타낼 제사장 나라라는 것을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린 피조물들의 온갖 죄악된 행위를 초월하여 영원 전부터 선재하는 창조주의 풍성한 은혜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풍성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에 감탄 감사 찬송하게 됩니다(롬11:5~6).
이러할 때 성도는 자신의 행위가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에 혼란을 겪게 됩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은혜로 구원은 따놓은 당상인데,굳이 신앙 생활에 힘쓸 필요가 있을까? 입니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에 의해 잃어버린 참자유를 획득한 자유인입니다.
이 소중한 참자유를 지키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 기도와 말씀에 깨어 있는 예배자로서 자신의 구원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전적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택한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에 관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전적 은혜는 무위,무책임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전적 은혜로 택하사 구원의 기쁨과 안식의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 살과 피로 먹여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맡겨진 일에 땀 흘리며 행동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찍부터 늦게 까지 일하고 들어 와 배고플지라도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준 후 나중에 먹는 것이 종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그나마 인정이 되는데 울 주님께서는 여기에 멈추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자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내가 전적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은 자인가? 아닌가?는 내 안에 수고하면서도 매사에 무익한 종됨의 인격이 있는지,없는지를 살펴보면 알 것입니다.
"7 :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얻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완악해졌습니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한에 속한 것으로서 율법 행위나 그외 자력종교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 받은 자들만이 얻고 힘써 율법의 의로 구원을 찾던 자들은 얻지 못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본성을 따라 완악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깐 율법 행위나 자력종교행위나 혼합종교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들의 핏값으로 날 용서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자신이 주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가 자신을 먼저 알고 택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를, 예수를 통해 전적 은혜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누구에게는 적용이 되고 누구에게는 적용이 안된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왜 나같은 자를 택하셨는지 다 알 수 없고,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에 종내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것으로 신비한 사랑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8:기록되기를 '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눈과 귀를 주셨다 '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신29 : 4.사29:10) 9: 또 다윗도 말하기를 '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가미와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10 : 그들의 눈이 어두어져 볼 수 없게 하시고 그들의 등이 영원히 굽게 하소서(시69:22~23) ' 라고 했습니다 "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공해 주신 생명의 떡을 밥상이라 부릅니다. 다윗은 자기를 배반하여 대적한 자들에게 생명의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다윗을 메시야를 예표하는 왕으로 이스라엘 위에 세우셨음에도 무리가 그를 대적하는 현상 속에서,다윗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보며 결국 그들의 보상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을 수 없도록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자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으면 등은 굽어졌고 몸의 등불인 눈은 어두워졌을까요?죄에,율법에 매어 굽실거리는 죄의 종으로,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11: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쓰러져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2 :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큰 부요함을 가져오겠습니까? "
이에 바울은 또다시 "그들이 내버릴 정도로 완전히 넘어졌는가?"라는 있을 법한 질문으로 복음의 편지를 써내려갑니다. 여기서 '완전히'가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히'쓰러졌다는 것인지,아니면 더이상 사용하기엔 쓸모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질적으로 '완전히' 넘어졌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게 되어 이스라엘이 시기(부러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환영했다면 그는 굳이 이방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열방에게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제사장 국가로서의 넘어짐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남은 자들을 보존하심으로서 국가적인 제사장 나라로서는 넘어졌지만, 남은 자들이 개인적으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 하나님 영광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열방에 알리시는데에는 실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한 핍박으로 뿔뿔이 흩어진 곳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전한 것도 그러합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할 당시 예루살렘에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삼 만명 가량이였다니 가히 짐작할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즉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메시야에게로 돌아 올 때의 충만함이 온 세계에 미칠 부요함이 얼마나 클것인가는 불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13:이제 내가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의 사도인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14:이는 내가 어떻해든 내 동족(골육)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5: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됐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 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6:첫 열매로 바치는 반죽덩어리가 거룩하면 반죽 전체 덩어리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17:그런데 가지들 몇개가 부러졌는데 돌올리브나무인 그대가 그들가운데 접붙힘을 받아 참올리브나무 뿌리의 자양분을 함께 나눠 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18:그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게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된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합니다.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를 나타내는 통로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사는 성도일수록 복음을 위해 귀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구원 받게 된 이방 교회의 풍성함을 보며 자신의 골육이 부러워하는 가운데 동족의 얼마라도 구원 받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동족을 사랑하면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예수를 사랑하면 할수록 민족 구원을 놓고 부르짖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선 이런 자의 기도를 통해 역사할 줄 믿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공동체 곧 구약 교회로부터 버려진 동족들로 인해 세상(이방나라)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게 되었다면 버려진 동족들을 다시 받아 드림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는거라 합니다. 유대인이 언약의 공동체에서 버려짐은 언약 백성이 언약 밖 소망 없는 사망의 자리로 추방 당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려진 동족을 다시 받아 드림은 죽은 사람 가운데 다시 살아 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국가적으로는 이미 죽었던 이스라엘의 국권이 다시 살아 남으로서 그 백성들도 마치 죽은 사람 가운데 다시 살아난 듯이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돌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버려진 동족의 부활을 본 것입니다.대단한 믿음입니다. 소년 다윗 한 사람의 믿음이 골리앗과 싸워 승리함으로 나라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라면, 바울 한 사람의 믿음으로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로마를 구원하면 조국 이스라엘도 구원 받게 되리라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바울은 제사 시 첫 열매로 바쳐진 반죽 덩어리가 거룩하면 전체 덩어리가 거룩하며,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다 합니다. 여기서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속사적인 섭리를 목적으로 따로 구별하신 이스라엘은 그 어떠한 넘어짐의 세월속에도,그 세월의 년한이 오래 걸릴지라도 반드시 구원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할렐루야!
바울을 보면 역시 그 예수님의 그 종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엘리야가 오랜 가뭄 끝에 셀 수 없이 많은 빗줄기를 불렀다면 바울은 골육 구원의 가뭄 끝에 수없이 많은 영혼의 구원을 불러 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눈에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믿음으로 드린 기도대로 지금껏 일하시며 앞으로도 일하실 것이 보입니다.
이렇게까지 동족 유대인의 실패 너머 묵시 세계속에서 완성된 온 세계의 구속사적인 섭리와 신비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편지로 기록한 바울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그 가지들(이스라엘)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졌다하여 그들을 업신여기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흔히 바울의 로마서를 보석 중의 보석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룬 9장~11장도 보석 중의 보석입니다. 하다면 기독교 역사는 과연 바울처럼 온 세계의 구속사적인 섭리와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시선으로 유대인을 대했을까요?
그들의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쓰러져 버림 당할 국가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받아드려 온 세상을 부요케 할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킬 것이라 하는데 과연 이 천년 기독교 역사는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였는가요?
"19:그러면 그대는'가지가 부지러진 것은 나로 접붙힘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20:그렇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으므로 부러졌고 당신은 믿음으로 서 있습니다 마음에 교만을 품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21: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으니 그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넘어진 사람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나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 역시 잘려 나갈 것입니다 23:또한 그들도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붙힘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24:그대가 본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하물며 원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해서 아무런 원칙이 없을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도 인자하심이 있고 준엄하심도 있다 합니다.
만일 열방의 교회들이 이스라엘은 안 믿었고 우리는 믿었다는 생각에 마냥 멈춰 서 있기만 한다면 믿음조차 은혜가 아닌 율법적인 의가 되여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스라엘)에게 복을 비는 자에게는 복을,저주하는 자에겐 저주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함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