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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1장
"25: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이 비밀에 대해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이방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가 완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겼던 교만이 깨어집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도무지 설득이 안되고 오직 성령의 감동 감화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비밀은 크게는 복음의 영역이라 할 수 있겠지만 롬 9장에서 11장에 흐르는 주제로 본다면 이 비밀은 이스라엘에 관한 민족적인 구속사의 섭리로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일부가 완악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의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산꼭대기에 다 오른 후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 뜻에 불순종한 동족으로 인한 고뇌와 고통을 찬송으로 끝을 맺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임에도 넘어진다면 하나님의 선택도 인간의 결정에 의해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에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NO!"라 하시며 오히려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이스라엘의 넘어진 실패에 담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하십니다.
왜그래셨을까? 일일이 묵상하다보면 수많은 것들이 발견되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도"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아도 하나님께선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스케일에 지장을 받지 않고 진행하실 수 있는 무수한 지혜와 모략과 지식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선택의 깊이를 더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그 어떠한 결정적인 행위도 하나님의 은혜를 증가시킬지언정 삭감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린 하나님께 선민 이스라엘이 넘어지는 것을 왜 처음부터 막지 않으신걸까? 어차피 구원하실 것이면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이스라엘을 천 팔백 년이 넘도록 온갖 망신과 수치와 조롱의 망국민이 되어 세상 천지를 유랑한 끝에 국권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은 뭐란 말인가? 그것도 생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대학살 끝에 그렇게 하신건 왜일까?
제가 물을 때 여호와께서는 되레 저보고 당신이 왜 그리하셨는지 답해보라 하십니다. 제가 이것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다윗의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
우린 순전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시며 시험 받으신 것을 잘 압니다.이는 마치 순전한 하나님 말씀이 흙으로 지은 바 된 육체 안에서 일곱 번 단련한 구속의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 사십일을 주리시며 인간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육체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고 시험하러 온 사단을 이기셨으니 순전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그 육체 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 내내 선포하신 순전한 말씀을 그대로 받지를 못합니다. 사람 계명과 저마다의 생각과 자기 뜻에 부딪쳐 걸러 넘어질뿐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시온의 왕인 당신께서 선지자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는데도 가장 먼저 메시야를 알아 보아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다수의 백성들이 알아 보지 못하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을까요?
"보라!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5
이스라엘의 망국은 민족적으로 그들을 흙 도가니의 불 속에 넣어 연단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연단 과정에서 불순물이 녹아 소멸되어질 때 일곱번 연단한 은 같이 순전한 구원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방인들의 수로 세계가 충만해질 때,이스라엘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전심전력으로 주의 이름/주의 말씀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찬송하는 소리로 온 예루살렘을 충만케 할 것입니다
이 천 년 가까이 오랜 세월의 연단 끝에 정금 같이 나오게 된 유대인들은 비로서 수난의 그리스도 안에 자신들이 있었고 자신들의 수난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음도 알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이 힘써 자기 생각 자기 의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이방,곧 세상과 화목케 되어 하나님의 크고 넓고 풍성한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준 그 이상으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풍성하게 나타낼 것입니다.
우린 세계 최강대국, 최고의 주권자인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려는 여호와의 뜻을 힘써 대적함으로 인해 그때 역사하셨던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여호와의 풍성한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지금도 시들지 않는 영광으로 온 세계에 알려 주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도 이와 같이 그의 넘어짐으로 여호와께서 이방 나라와 화목케 된 풍성한 은혜를 오늘날까지 세계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전 14세기에 여호와의 뜻을 힘써 불순종한 자가 애굽 바로였다면 주후1세기에는 이스라엘이였다는게 낯설지만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바로란 강력한 자아 왕도 있고 종교적인 자기 열심에 사로잡혀 믿음의 의가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소경들도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메시야의 사역이 처음도 나중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우리를 보게 하는 거라면 날마다 제 자신의 소경됨을 고백하며 그분의 치유하심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26 :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 하실 것입니다. 27 : 이것은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애 버릴 때 이루어질 것이다 '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다시 또 기록된 바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구원을 일관성 있게 주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59:20~21
아멘! 아멘! 아멘!
"28: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여러분으로 인해 원수가 된 사람들이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조상들로 인해 사랑 받은 사람들입니다.29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28: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카톨릭성경
문득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동족들을 변호 변명하고 있는 걸까?생각하게 됩니다.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황제로부터 추방령이 내려 생존의 어려움에 처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처지를 바라보는 이방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죄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이 받아야 할 당연한 처사라고 여겼을까요?
바울은 유대인의 불순종과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조상을 택한 하나님의 호의 가득한 선택은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더구나 저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 세계로 화목케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게 되어 하나님과 세상과 회목케 되었다면 어떻게 저들을 마냥 정죄하며 멸시 천대해도 될 것인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30:한 때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31:이와같이 이스라엘이 지금 순종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에게 베푼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32: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선민 유대인이라해서 마냥 순종의 자리에서 긍휼히 여김 받는게 아니고 또한 이방인이라해서 불순종의 자리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게 아니라 합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불순종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이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의 자리로 돌아 오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거라 합니다. 바울 당시 침륜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바울의 고통이 낯설지 않음은 함께 신앙 생활하다 원치 않는 표류를 하고 있는 자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셨다 합니다. 이 가두심은 가두심이 목적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라 하십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욥38:8~11
저의 넘실거리는 불순종의 물결과 파도를 가두시고 제 오만함과 교만함의 씩씩거리는 거친 숨결을 보시며 <얘야! 여기까지야 더는 아니야>라고 속삭여 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시라는게 무한한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저의 넘어짐도 불순종도 패역함도 온갖 죄악들도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긍휼하심의 은혜에 이미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떠한 삶이 펼쳐질까?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33 :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도다 34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누가 주의 조언자가 됐는가? 35 : 누가 주께 먼저 드려 주의 보상을 받겠느냐? 36 :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인해 있고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