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2017년 10월 19일 묵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만큼, 내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잠긴 몸만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린 양 유월절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죄악된 애굽으로부터 광야 교회로 불러 내신 부름에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예배의 첫 출발은 까마득한 그 때나 지금이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고,또한 이 피를 보고 마땅히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그 피를 보고 너머가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있습니다.그러니 이것을 기념하는게 곧 예배입니다. 예배의 처음도 나중도 이 자세일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성령의 목소리나 그 외 다양한 능력으로 나타나 섬겨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우리 공동체가 피차 사랑의 빚외에는 지지 말아야 할 것이 이 예배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모인 예배 속에 참석했던 예배자들은 반드시 흩어지는 예배 속에도 참석해야하는 예배자들이라는 걸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서두에서 권면한 영적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는 공동체 예배에만 적용시키지 않고 예배자가 살아가는 현장까지 확장시킴으로서 일상 예배자로 살아갈 것을 권면해주십니다
내가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가는 일상은 21세기란 이 시대의 지구촌에 사는 수많은 민족들도 함께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물론 국경,민족,정치,문화등등 크고 작은 다름이 많으나 분명한 건 한 하늘 한 날짜 한 지구에 갇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상 예배자인 나는 이 지구에 갇혀 사는 옛 사람이 아닙니다.곧 옛 하늘 옛 땅에 갇혀 사는 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 세대, 곧 이 시공에 갇힌 지구촌의 체제로부터 늘상 새롭게 변화 받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은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를 땅적 존재로 끌어 내려 땅에 붙밭이로 살아 갈 것을 늘상 선전합니다
그래서 맘몬이든 그 어떠한 형상이든 그것을 신으로 섬기면 섬길수록 이미 땅적 붙받이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천형을 더 고착화시킬뿐입니다.그렇다면 과연 핵의 위험과 자연 재앙과 종교 전쟁과 인종 차별과 도덕 윤리 부재등으로 인해 몸살하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희망은 과연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희망입니다. 근데 이렇게 말만 하면 희망입니까? 네, 믿음으로 선포하는 말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허나 과연 믿음이신 주님과의 줄기차게 교제 교통되는 유무상통의 선순환속에 복음이 희망이라는 말을 당차게 선포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는다면 말로만 희망이 되어질뿐입니다 그래서 진절머리날정도 상투적인 희망의 말만 남용하게 됩니다. 이것을 막는 길이 바로 일상 공간이 영적 공간이 되도록 만든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입니다
초대교회 유무상통을 단지 물질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공산주의가 나옵니다 핍절한 자가 부유한 자로부터 받게 되는 물질적인 공급 차원 뒤에 계시는 성령님의 운행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린 초대교회 유무상통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생깁니다
절대 무인 우리들 가운데로 절대 유이신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와 인애의 터로 장막을 치고 오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허무로 돌아갈 모든 일상의 호흡을 영이신 하나님의 숨(생기)과 교환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도의 기도가 인자 예수 이름에 실려 위로 올라가면 아버지 보좌로부터 천사가 응답을 가지고 내려와 받게 되는 이 놀라운 현상이야말로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이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받게 되면 감사 찬송의 화답의 숨결로 아버지 보좌를 향하여 올라가게 됩니다. 이에 다시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풍성한 생명의 기쁨과 필요를 공급 받게 됩니다 이로써 하늘과 땅이 상호 순환하는 터가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가는 성도의 몸이라는 걸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희망인 것입니다 지구촌의 한계를 너머가는 희망찬 복음의 실존적인 운반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린 날마다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상투적인 희망으로 넘겨주지 않게 됩니다 듣고 또 듣는가운에 실로 들려지는 희망 가득찬 에너지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산 제물 산 제사란 영적 예배를 능히 드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 복음은 아버지의 능력이요, 의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말씀으로는 잘 알지만 일상적인 공간의 삶속에 파고 들기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실천적인 고통속에 인내와 오래참음의 연단이란 세월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한계선상에 똑바로 서계신 자가 있었습니까? 모든 버림 받음의 절정에 서 본 자가 계십니까? 그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신뢰한 자가 있습니까? 믿음 있다 하는 이들은 선뜻 대답하겠지만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모든 인류, 곧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하게 겪고 있는 한계선상에서 터져나오는 절망 절규 오장육부 혼의 통증 끝에 기절이나 충격 후 다시 깨어나면 더 더욱 선명해지는 두렴 공포 불안 등등 모든 고뇌와 저주와 최악의 집약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한계에 부딪쳐 부활을 증명해내셨습니다 이 부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죄인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린 그저 스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머뭄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머뭄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유무상통의 터전이 되게 하려하심입니다 그렇게 예수안에 머물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살아났고 살고 살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보지 않고 믿는 우리까지 그분의 끝, 한계선이였던 십자가 안으로 초대하여 그분의 모든 말씀을 공급해주심으로서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습득된 모든 지식들에게 까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마지막 육체로서의 종말을 고하는 십자가를 두려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죄인들로 인해 철저히 버림 받아지는 순간조차 그는 아버지를 믿고 신뢰하는가운데 영혼을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담더 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능력과 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만큼 알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허나 우리가 연약하여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을 믿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신 아버지의 능력과 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 안에 머물게 때 나는 내가 왜 이 세대로부터 꺾이어져 장차 가나안 땅(천국)을 차지하게 될 광야 교회로 불리워지고 있는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만큼 나는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 받는 것 조차 나 스스로의 적극적 의지나 능동태로 안된다는 걸 어느만큼 아십니까? 내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이런 사소한 것들마저 내 무익성을 철저히 고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임금들은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선악간의 도덕 윤리로 모든 도덕규범을 지켰다해도 마음은 여전히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일뿐입니다
상대성 선과 악은 언제든 선의 배후엔 악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내 선에 판단되어지는 악을 증오하는 마음조차 분리시켜 절대 선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될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대적하고자 하는 나의 진노 받아 마땅한 본성을 향해 명하십니다 내 속에 끓어 오르는 진노를 아버지께 맡기라합니다 대신 그런 내 본성에 참된 살 참된 음료를 먹이고 마시우게 하라 합니다 이 때 내 본성은 거룩한 심판의 불꽃에 타들어가는 시원함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보이는 권세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세를 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압도당한 자가 세상 권세가 무서워 섬기겠습니까?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며 우린 양심마저 빼내고 섬길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양심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내 다양한 관계속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의 공간인 일상이 영적 공간이 되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야말로 영적 예배를 함께 모여 드리고 흩어진 예배자들의 몫입니다 다 함께 모여 드린 영적 예배는 반드시 일상속에 산 제물을 창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