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장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묵상하노라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만들어진 여섯째날에 화룡점정을 찍지 않고 일곱째 날에 찍습니다.
왜 그랬을까 묵상하노라니 여섯째 날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만드셨다는 것에서 힌트를 찾아봅니다. 온갖 짐승을 만드신 후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만드사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까지 다스리라는 위임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 위임권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신 존귀요,영화요,영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성경은 육을 인간의 수,혹은 짐승의 수라고 일컫는데 이는 마치 반인반수를 연상케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본능대로 사는 짐승과 같다가 아니라 짐승만도 못하다고 증거하니 하는 말입니다.
화룡점정은 가장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하여 일을 완벽하게 끝낸다는 뜻으로 그림 화, 용 룡,점찍을 점,눈동자 정으로 만들어진 한자입니다.
고대 중국 양나라에 유명한 화가 장승요가 어느날 절간으로부터 그림 부탁을 받아 벽에다 네 마리 용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합니다.
왜냐면 용에게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기에 그리 했다 합니다. 허나 아무도 믿지 않자 그 중 한 마리의 용에게만 눈동자를 그려 넣는 순간 천둥 번개 치는 하늘로 날아 가더랍니다. 이에 3마리 용들만 벽에 남아 있게 되었다 하여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해 아버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일찍 죽임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 양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데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곧 성령을 뜻합니다(계5:6).
깨닫지 못하는 짐승 같은 저희들에게 영안을 열어 주시기 위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일곱 눈,곧 성령을 보내 주심에는 천지창조 속에 깃드인 아버지 마음을 깨달아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즉 범죄하여 사단에게 빼앗긴 만물을 다스리라는 영광스러운 위임권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함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
범죄함으로 인해 인간만 아픈게 아니라 자연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면서 자신들을 다시 회복시켜줄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한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하나님 아들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다스리라는 위임권 회복에 영안이 열린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의 회복에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여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며 만물과 사람과의 상호 의존성을 놓고 부르짖습니다
이 만물을 다시금 회복시키사 충만케 하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교회를 통해서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먼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들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면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나무 잎들을 지상으로 보내 달라고 열렬히 예수 이름으로 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죄를 씻는 일에 동참하여 날마다 주의 보혈로 열방을 씻겨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오늘날 세상의 빛과 소금은 단순히 사회적인 선행에 국한된게 아니라 이상 기온및 공해와 소음으로 몸살하는 자연 만물의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인해 어쩜 우리가 당신을 거역하는 일도 문제이려니와 이 아름다운 지구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이런 문제를 모르실리 없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홀로 창조 업적에 따른 모든 창조 지분을 소유하사 친히 정복/다스려셔도 합당하신 분이시건만 먼지 하나 만든 것 없는 인간들에게 그 창조 지분들을 분량껏 나눠 주실 목적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숙연해집니다.
창조주만이 가질 수 있는 본성을 말하라면 단연코 피조물과 철저히 구별된 거룩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도 바로 그 거룩성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또한 그분의 창조성은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는 자유로움에 기인할 것입니다. 이 자유는 얼마든지 당신 마음대로 창조물들을 통치 하실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을 뜻합니다.
그런 분께서 당신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자유를 통제 억압 강요하시기 보담은 오히려 당신 대신 삼라만상을 정복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에 우린 단 한번만이라도 진심으로 경배드려 본 적이 있었을까요?
교리와 신앙 지식과 몸에 익히 배인 종교행위로는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진실로 저에게 모든 것을 태초부터 다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깊숙히 포개진 마음으로서의 경배는 그분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창세기를 묵상하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도도함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그분은 실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특히 스스로 숨어 계시는 당신의 마음을 보임에는 더더욱 그러하십니다.
천지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도다"라고 외치신 예수님과 다시한번 더 만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분이 아니였다면 저는 무슨 낙으로 살까 싶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 아버지 뜻에 무릎 꿇고 복종하심으로서 천지만물이 다 회복되어졌으니 어찌 감사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안하신게 아니라 그 하시던 일을 마치고 안식하십니다.
2절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두 번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러니깐 일곱째 날에 하시던 일을 그만 두시고 안식하신게 아니라 하시던 일을 마무리 짖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공생애 사역 시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시는 것으로 안식하셨는데 바로 천지창조 일곱째날에 하나님께서도 그 하시던 일을 마침으로서 안식하십니다.
역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십니다. 이로써 우린 하나님의 안식은 일과 동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일과 붙어 있는 안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