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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벗었음을 알고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치마(허리 띠)를 삼은 그들에게 '그 날'이 왔다는 것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나에게도 '그 날'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그 날'의 어떠함을 "바람이 불 때(레루아흐)','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날이라 합니다.
히브리어 '레루아흐'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 '레'와 영,숨,바람,성령,때론 마음의 성향,태도를 뜻하는 '루아흐'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녁 바람',혹은 '서늘할 때'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시간을 뜻하는 전치사 '레'를 굳이 '루아흐'앞에 쓰심은 그 날이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에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루아흐'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은 창1:2절이며 두번째로 나온 곳이 창3:8절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물 속에 빠져 있는 땅을 누군가 애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품고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그분을 '하나님의 영(루아흐)'이라고 최초로 말씀해주십니다.
두번째로 '루아흐'가 쓰여진 장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물 속에 잠겨 있는 땅과 닮은 꼴이 된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나신 '그 날'입니다.
첫 아담은 범죄한 그 즉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영광스러운 본인 얼굴을 심연에 빠트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루아흐'는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탄식으로 죄인과 동산을 품고 거니시며 떠나시지 않고 죄인을 찾아 오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집니다
'거니시는'의 원어는 '미트할레크'로 '할라크(걷다)'의 재귀동사형입니다.
재귀동사란 어떤 동작이 동작하는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는 걸 뜻합니다. 가령 나는 걷는다라고 한다면, 걷는 동작인에게 보행의 혜택이 주어집니다. 걷고 걷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거나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되거나 혈액 순환이 잘되는데 그 혜택이 동작하는 자신에게 돌아 오는 걸 봅니다.
기도도 기도하는 당사자에게 기도의 큰 혜택이 돌아 오는데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친밀성입니다. 기도란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로 본인이 힘써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으면 그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음식도 기껏 만들어 놓고 나는 안먹고 가족들에게만 주면 나는 기진하게 됩니다.
성경이 '거니시는'을 재귀동사형으로 기록한 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깊은 곳,마음)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자에게는 숨기시지 않으려 하심입니다.
성경은 범죄 전이나 후나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탄식으로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깃드인 땅과 죄인들을 떠나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당신의 뜻을 품고 그 주변을 돌며 거니신다는 것을 아득한 그 때부터 증거해 주는 책입니다.
타락한 아담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망 상태입니다. 허나 '그 날의 영'으로 찾아 오셨다는 걸 기록해 놓음으로서 복음을 들려 주십니다.
육은 살았으나 영은 죽어 있는 우리들이 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나 첫 아담을 찾아 오신 그분께서 '그 날의 영'으로 지금의 나도 찾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자로 세워져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날의 영'으로 지구 곳곳 모든 민족들을 찾아 오셨다는 걸 입증하듯 온갖 다양한 매체들과 수많은 교회들과 종들과 성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의 소리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랄 것을 명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자들이라면, '그 날의 영'으로 찾아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도 그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첫아담의 실패를 만회할 것입니다. 하여 '아멘!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며 등불 들고 마중 나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첫아담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곱 눈이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비로서 범죄한 첫아담으로 인해 심히 괴로워하셨던 여호와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조금씩 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을 아픈 마음으로 걸으시며 다시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 오기까지 겪으셨을 그분의 마음의 진통을 감지하며 알 수 있는 그의 신부,그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후2:16
신앙 생활이란 성경을 통해 말씀의 위대한 기적과 능력을 경험할 때도 있지만 말씀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도 우리처럼 기쁘기도,슬프기도,아프기도하시며 때론 격렬한 분노와 갈등과 충돌에 휩싸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때때로 나도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고 싶을 때면 일부러 런닝 머쉰 위로 올라가 걷고 달리기를 반복하며 영으로,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하는 과정속에서 온전한 신성이시며 온전한 인성의 연약한 육체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어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못박을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선 다윗 그 이상으로 모든 전쟁의 백전백승 대 영웅이십니다.~^^
여자로 태어나 이런 멋진 대 영웅과 동거한다는게 말할 수 없는 영광이요,심오한 사랑이요,값비싼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만일에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알기를 원한다면 성경 최초로 자신을 "에고 에이미 (I AM WHO I AM)"로 모세에게 소개하신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육신일뿐일 인간 속에 신성한 생기(니스마트 하임 )를 넣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처럼 오늘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신성한 부활의 숨결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요20:22). 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 잃어버린 영적 생명을 얻되 영원히 사는 영생을 성령의 열매로 받게 됩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숨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숨은 오순절 그 날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합니다(행2:1~3).
창2장7절에서는 아담의 의사와 상관없이 '니스마트 하임(여호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았다면 요20:22절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루아흐(성령)'를 받을 것인가? 안받을 것인가?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들은 자들은 500여명이었으나 막상 성령을 받은 자는 120명으로 나머지 380여명은 자신들의 의지로 성령 받기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내가 받느냐? 거절하느냐?는 여전히 인간의 자유의지 행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린 영혼 구원을 놓고 강청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그 이름들을 찾아가 세상 신에 복음의 영광이 가리워져 그들의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흉악한 마귀의 사슬을 풀어 달라고 강청하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물 속에 있는 땅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얼굴을 심연에 빠트린 불쌍한 우리 자식들과 표류하는 젊은이들을 놓고 강청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린 영생을 주시려고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인간으로 자기 땅에 오셨을 때 한결같이 표적과 기적으로서의 신적 능력만 기대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실로 그의 무흠 무오하신 인성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껏 관심을 보인 건 흙수저라며 그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부인한 유대인들처럼 우리 역시 나를 흙수저 상태로 내버려 두실 때 그분께 실망한 경험들을 한 두개씩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 그 에덴 동산을 거니시면서 타락한 인간을 먼저 찾아 온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아무리 품으려 해도 품겨지지 않는 예루살렘 성을 속죄하시기 위해 그냥 떠나시지 않고 다시 돌아오시는 발걸음으로 아버지께 간구하신 기도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
이 일 후 수제자 세 명만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 안으로 깊이 걸어 들어 가시면서 심히 놀래시며 슬퍼하시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 나아가사 땅에 엎드러 기도하십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14:36~38
위의 말씀을 읽노라면 겟세마네 동산을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괴로움은 그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볼 수 있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분만이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에덴 동산 깊숙히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죄인을 정당하게 심판하실 수 있는 공의의 신이심을 잘 압니다. 그런데 놀라운건 성경은 죄인을 심판하시려고 첫아담을 찾아 오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요12:47)"라고 말씀하신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 두 사람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려 사람의 몸을 입고 모든 죄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 안으로 거니시는 발걸음은 에덴 동산을 거니시던 그 분의 발걸음이라 하겠습니다.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의 격렬한 충돌의 발걸음은 결국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땀이 핏방울 같이 떨어지도록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이 평화를 얻기까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신성의 뜻에 격렬하게 충돌하는 육신과 혼(마음)의 투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신이시기에 능치 못하심이 없는가 하시면 온전한 인간이시기에 얼마든지 생각하시며 충돌하시며 갈등하시며 괴로워하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시듯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셨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범죄한 인간을 다시 찾아 오시기 위해 채찍과 십자가에 못박혀 찢기신 살과 터진 혈관 못지 않게 그분의 마음도 찢길대로 찢기시고 터지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타락한 아담 부부에게는 매우 불편해 그분의 낯을 피해 숨은 곳이 동산 나무 사이입니다.
생명자체이신 그분의 인기척만 들려도 심장이 뛰며 그분을 한 순간이라도 더 빨리 뵙기 위해 잰걸음으로 마중 나가던 사랑으로 충만했던 흔적과 기억은 있건만 이젠 그런 심장도 그런 흥분된 걸음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최초로 등장한 죄인이 보여준 영적 무감각/무능력의 안타까운 장면을 보니 가슴이 아파옵니다.
찾아 가지도 찾아 오지도 않는 길엔 잡초만이 무성하고 쓰레기만 쌓여지게 되어 있던 샛길마저 묻혀질 뿐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라 자처한다면 교회내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실행하지 않는 자는 영적 생명에 무감각한 자일 것입니다.
아버지!
주께서 오시는 소리에 등불 들고 마중 나갈 수 있도록 장터에서 사고 파는 기름이 아닌 오직 회개하고 선물로 받는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