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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릅니다.
제가 마흔 정도 되었을 때 하루는 남편이 어머님께서 아프셔서 토론토 병원으로 모시고 가느라 혼자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일한 후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거장을 향해 가려고 빨간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건너편에서 어둠을 뚫고 "지혜야! 지혜야!"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게 문닫는 시간에 맞추어 오느라 서둘러 왔을 남편이 큰 딸애 이름으로 절 부르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임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화목을 누리게 된 우릴 향하여 "아담아! 아담아!"라고 불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만큼 달콤한 목소리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최초로 범죄한 첫아담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산을 거니시며 찾아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에 그의 낯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의적으로 몸을 숨깁니다. 인류 최초로 자신을 만드신 분을 싫어하는 불협화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에브라임이란 아담의 후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 알아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렘31:20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불쌍히 여기심으로 창자가 들끓는다고 표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선 결국 창자를 지닌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살과 뼈가 패이는 채찍에 맞아 창자까지 드러난 몸으로 기꺼이 죽어 주십니다.
죄에 팔려 숨어 있는 아담을 찾기 위해 그분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고 아담을 대변하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나도 내 가게로 아담의 후손인 손님이 오면 그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 줍니다. 거의 칠 십여명쯤 되는데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영혼 구원의 열정으로 부릅니다. 내가 지금 부르고 있는 이름들이 십자가의 주 보혈에 씻겨 생명책에 기록 되어지길 그 이름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릅니다.
무엇이 나로하여금 이리 간절한 소원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범죄하여 당신께로 다가올 수 없는 나를 포함한 모든 아담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흘리신 그 피가 항상 살아서 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 온전히 미친 자가 아니면 정말 미친 짓이라 할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가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그는 지금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히1:3). 그가 위엄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함은 그가 정체된 관념이나 이상으로서의 으뜸 통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영생을 주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집행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실로 그를 사랑하는 자는 지금 그가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보고 들으며 그 일에 올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행히 아담은 자기를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왜 <하나님의 목소리>로 들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기 전만해도 여호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로 온전한 친교를 누리던 아담이 이제는 여호와의 생명적인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죽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아담에게는 지극히 초월적이며 절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종교성만 한 조각의 파편처럼 남아 있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생명관계가 산산이 깨어진 파편으로 남은 것이 그나마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 안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이 아닌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한 하나님으로 이런 하나님은 여러 종교의 대상이거나 미신과 우상과 온갖 정령신앙의 온상일뿐입니다.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실로 그러한가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창2:16~17)로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눈에 옳다 여겨 미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려고 힘써 깨어 있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범죄의 시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진리의 말씀 분별'이란 은사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모든 은사들의 머리라 하겠습니다.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찾은 목소리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이건만 그 목소리를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게 된 아담의 불행을 기억함으로서 모든 교회는 진리의 목소리를 분별함에 눈을 새롭게 떠야할 것입니다.
인류가 먹은 선악과로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이 하나님 같이 된 비참함의 절정은 저마다의 선악지식체제에 갇혀 판단과 비판과 정죄와 심판의 엉겅퀴와 가시덤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의 원어는 아롬입니다.
이 말이 처음으로 쓰어진 장면은 창2:25절로 그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어도 수치스럽지 않았는데 두번째로 쓰어진 본문(창3:10)에서는 무화과 나뭇잎 옷을 입었는데도 벌거벗은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에 아담이 대답한 말입니다.
이때 아담의 두려움이 정녕 여호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 안에서의 경외함이라면 굳이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나 그의 두려움은 자신을 감싸주던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싸개가 벗겨진 두려움으로 자신의 생명 없음(죽음/죄)을 변명하는데 급급합니다.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서 삼은 치마옷(허리 띠)이 그렇고,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게 그렇습니다.
여기 동산 나무 사이(히:베토크)라 함은 동산 나무 가운데를 말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라는 말이 맨처음으로 쓰인 곳은 창1:6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히:베토크)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고"창1:6
'베토크'는 전치사 '~안에','사이에'와 동사 '절단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명사'타웨크(중앙/중간)'의 합성어로 '~한가운데에/중앙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신 목적은 아랫물과 윗물로 나누사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아랫물과 윗물로 나누어지는 중앙에는 아랫물과 윗물의 교집합 부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유일한 중보자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왜냐면 신약에 이르러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만남의 거점이 되시려고 대제사장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으신 분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절대자 하나님도 아시고 사람으로도 사셨기에 사람도 아시니 하나님과 사람 사이 한가운데서 능히 하나님 뜻인 인간 구원을 이루신 유일한 중보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위(성령으로 잉태)에서 태어나신 그를 유일한 중보자(대제사장)로 믿어 마음의 한가운데 모시고 함께 먹고 또 먹으며 사는 것이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고 먹음으로서 생명의 연속성 안에 살고 있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아담이 숨은 곳을 주목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동산 나무 곧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울타리 쳐서 보호하신 동산 밖 드넓은 에덴의 초원이나 강가나 숲속이 아닌 동산 중앙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 사이에 숨었다는건 깊이 묵상해볼만 합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성도라 자처하면서도 복음과 율법 안으로 벌거벗고 들어 가는게 아니라 옷을 껴입은 채로, 그러니깐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교회에 앉아 있는 현상을 폭로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성경은 범죄한 첫 아담이 자기를 변명한 말과 그 숨은 행위와 숨은 장소를 기록해 놓음으로서 거울이 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무슨 멧세지를 듣습니까?
더이상 동산 나무 사이,곧 복음과 율법 사이에 숨지 말아야 한다는 멧세지를 듣습니까?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증거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영들은 산제물이 되어 지금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삭제시킨채 우리(아랫물)끼리 상호 연대하여 엮은 모든 허리 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질 때마다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받을지라도 벌거벗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에 더이상 숨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은 자는 그렇게 죽어야만 그리스도의 찬란한 부활 생명과 하나되는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알기에 그리 합니다.
이러므로 최초의 진리요,말씀이요,명령이요,복음과 율법이라 할 수 있는 창2:16~17절에서 나오지 않은 복음은 다른 복음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